분단구조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반공이념 의정 치적인 이용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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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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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분단 구조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반공이념의 정치적인 이용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현재 추진중인 한반도의 남북 화해 분위기에 아직도 `북진통일` `대북안보`를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다. 우리의 안보대상이자 주적은 어디까지나 북한이라는 것이다. 한편, 남북의 평화통일을 추진해 가면서도 정부는 국가보안법으로 계속해서 정부에 비판적인 사회운동가들을 체포, 연행해가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북한체제를 `반국가단체` 혹은 `괴뢰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적용에는 `이적단체`에 대한 `찬양 및 고무 선동`을 기준으로 한다. 북한은 영토를 가지고, 국민이 있으며, 주권을 행사하는 명백한 국가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 존재에 대한 비하와 국가보안법을 통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은 아직도 이 땅에선 반공이 통치 계급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경제사연구회는 해방후 펼쳐진 반공을 통한 정권의 횡포의 역사를 미흡하나마
간략히 더듬어보고자 하였다. 본문의 구성은 한국전쟁이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만큼, 한국전쟁의 전후 두부분으로 크게 나누어보려 한다.
2. 한국 전쟁이전의 좌우 대립 상황과 이승만의 독재 권력
정부 수립에서 한국 전쟁 발발까지의 반공정책
이차대전의 종전후,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신생독립국가들에 대한 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식민지 국가들은 자국의 식민지 잔재 청산과 모순에 빠진 사회경제 구조에 대한 대대적 개혁을 통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꾀하였고 이러한 혁명적 경향은 소련의 혁명 수출이라는 목표와 공산주의 패권의 확립이라는 의도와 통하는 것이었다. 공산국가의 확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질서에 위협을 가져오는 것이었고, 따라서 미국은 친미적 성향의 정부를 구성시켜 사회주의 혁명과 소련의 영향에 견제를 가할 필요가 있었다. 비혁명을 지향하는 미국의 성향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식민사회의 보수우익 제국주의 협력세력과 이해가 맞닺는 것이었으며, 이들은 자연히 서로 연계하게 된다.
아시아의 한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좌익 계열을 비롯하여 중도 좌파,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에 이르는 진보진영의 지식인들과 대다수 민중들은 토지개혁을 통한 봉건잔재의 일소,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숙청, 매판자본의 국유화, 식민지 권력기구의 해체등 대대적 개혁을 혹은 혁명을 통해서 민족독립국가를 수립하려 하였고, 친일 보수우익과 이승만세력은 자신들의 혹은 자기 기반세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미 국가를 기획하는 미군정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보수우익의 이해와 충분히 일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 육군성 차관보 맥클로이의 비망록에 보이는 미국의 아시아 개입 규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새로이 등장하게 될 정부가 공산주의를 채택하는 것을 방지하고, 둘째 미국의 힘과 국익에 대해 신생 정부가 의문을 제기해선 않되며, 셋째 반공적 리더쉽이 갖춰지면 그것을 공고화하는 작업이 뒤따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군정의 이러한 의도를 자연스레 뒷받침할 친일 보수우익을 그들은 지원했으며, 구 식민지의 체제를 그대로 온존시키려 하였다. 일제하의 관료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 예로 일제시대의 경찰 8,000명중에 5,000명이 그대로 재고용되었다. 정부로써의 틀을 갖추어가던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산하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군정에 의해 그 존재가 부인되었다.
미군정과 보수우익세력의 이같은 행태는 수많은 민중들의 혐오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진보세력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이어졌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탁 투쟁속에서 상황은 급변하고 만다. 한국의 임시정부의 재빠른 수립을 촉구하고 정부 구성후,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최장 5년 4개국의 상호 견제하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의한 모스크바 3상회담의 내용이 신탁통치만이 강하게 왜곡된 채 국내에 전해진 가운데, 좌익의 찬탁은 민중들에게 또다른 식민시대를 부르는 매국행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친일 극우세력의 반탁은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가고, 과거 자신들의 행위를 위장하는 새로운 정치적 정통성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탁은 곧 반공을 통하여 전체 진보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27 구국 투쟁, 43 민중항쟁, 58 총파업등의 단선저지 투쟁과 김구김규식등에 의한 남북 협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1948년 남북에서 모두 독자적인 정부들이 수립된다. 이승만과 그 세력은 당초 부족했던 정통성의 부재를 반공이념에 대한 매진과 반공투쟁으로써 해결하려하였다. 정권은 반공정책을 뒷받침할 물리적 장치들을 조직해 나갔다. 이승만은 극우청년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고 스스로 총재가 되어 이를 사조직화해 나갔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국가보안법 공포후 1949년 한해동안만 11만 8,621명이 체포 투옥되었고 132개의 사회단체들이 와해되었다. 군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국가보안법에의해 기소된 군인의 수는 8천을 웃도는데 이것은 당시 전체군의 10%를 헤아리는 숫자였다. 이로써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의 반일 민족주의 계열 군인들과 좌익계열의 군인들까지 모두 숙청된 군은 그 자체의 경직된 특성상 철저히 반공 집단화 되어간다.
해방후, 전쟁의 발발까지는 자주적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이 좌절되어가며, 구 식민지 잔재인 친일 극우세력들이 반대파 진보세력 및 민중들을 철저히 탄압해가던 과정이었다.
한국 전쟁 시기의 남한의 전시 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