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장군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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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선지 장군의 일생
우리 역사에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고구려는 역사속에서 사라진지 1천5백년이 지났으나 그들의 숨결은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다. 특히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때 당나라의 흥망성쇠를 주름잡았던 명장 고선지는 중국 대륙은 물론 중앙아시아, 동유럽 지역에까지 위세를 떨쳤으며 우리의 선인 고구려인이었고 그의 전역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명장들이 결코 따를 수 없고, 동서고금에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없던 초인적인 전적을 남겼다.
고선지 장군은 중앙아시아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장악하고 서역일대의 통치자로서 10여 년 동안 군림하였다. 더욱이 그의 작전기동은 죽음의 사막과 설산을 극복하는 대장정의 기록을 남겼으며 이는 알렉산더나 한니발 장군이 따를 수 없고,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불후의 쾌거였다. 이러한 그의 빛나는 업적은 중국의 정사에 보존되어 오다가 서양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짐으로써 우리 선인들의 발자취에 커다란 충격과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1) 유년, 청년시절 고선지
고선지의 아버지인 고사계 장군은 안시성 싸움에서 패전한 이후 당 군에게 볼모로 끌려가 중국 제남땅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고선지는 패전국의 설움을 달래며 5년여 동안 곳곳을 떠돌며 방황하다가 당나라에 들어와서 14세 때에 부친과 상봉하게 된다. 그러나 당의 감시하에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중국대륙의 서쪽 변방인 하서지역까지 이주하면서 망국민의 설움을 달래야만 했다. 그들이 머물던 하서지방은 당나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북쪽에는 몽고족이 살았으며 고비사막과 서쪽으로 뻗은 곤륜산맥의 아래 티벳 고원에는 산악민족인 티벳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때마침 티벳 족이 세운 토번국은 당의 국경지대를 어지럽히고 있었고, 당에서는 하서에 군대를 보내기로 했으나 멀러 떨어진 변방에 이를 수 없었으므로 볼모로 끌려와있는 타민족 중에서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군사를 보충하기로 하였다. 이무렵 고사계는 당의 하서군에 입대를 하게되고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우게 되니, 교장으로 승진되어 사령부가 위치한 안서도호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곳은 북쪽에 천산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서있고 당나라의 서역교역로를 관리하는 중심기지였다. 부친을 따라 안서에 온 고선지는 광할한 대륙의 지세와 험한 지형과 기후조건을 이겨내는 주민들의 생활비법을 터득하였고, 정복의 꿈을 키워나갔다. 또한 서역으로 왕래하는 대상들을 통하여 서역제국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고선지의 성장과정은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구당서」와「신당서」에는 “고선지는 그 풍모가 수려했고, 승마와 궁술에 뛰어나며 결단력을 가진 용감한 장군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사계는 서역 교역로를 통해 왕래하는 대상들을 보호하고 적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군사들과 함께 출동할때마다 아들 고선지를 대동하였다. 그때마다 고선지는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우고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약관 20세에 안서도호부의 유격장군으로 발탁되었다.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에 위치한 구자도독부에서 수련을 쌓으면서 당나라 대상들을 습격하는 티벳 족들과 싸워 공을 세우니 740년 경 당에서는 언지도독부의 진수사로 승진되었다.
당군과 지역부족민을 규합한 고선지는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험난한 산악과 사막지대에서 적과 싸워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피나는 조련을 실시하였다. 행군과 기마전법을 익히고 보급수레를 이끌고 산악을 극복하며 군사들이 지리에 밝을 수 있도록 서역의 지형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은수실, 봉상청, 이사업과 같은 뛰어난 무장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특히 지략과 병법에 능통한 봉상청은 애꾸눈에 한쪽 발을 저는 불구자였지만 평생 그와 함께 대사를 도모하여 전략을 논하기도 하였다.
고선지는 사막의 고열과 건조한 기후 속에서 군마들이 생존하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과 병법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그 무렵 파미르 고원의 산록에 위치하여 대상들을 빈번히 습격하는 달해부라는 작은 부족국가를 정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고선지는 4천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해부를 향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였고 파미르 고원의 험산준령을 넘어 달해부를 물리쳤다. 이러한 전승 보고를 받은 당 황제 현종은 크게 감동하여 741년 고선지에게 안서도호부의 부도호 겸 안서 4진 4진은 안서도호부의 예하기관으로 당의 서역통치를 위해 설치한 도독부로서 현자 카라샤르, 쿠차, 카슈칼, 코탄을 일컫음 양대규, 고선지장군 서역대원정 연구 (대륙연구소, 1995)
의 도지병마사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서 고선지는 일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불행한 시절을 이겨내고, 당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무장으로서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그리고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장악하고 당나라의 서역 교역로를 통제하는 중요한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2) 서역정벌 시절 고선지
고선지가 활약한 당 현종시기는 당의 전성기였다. 수도 장안에는 100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 정도로 국제도시를 이루었으며 국가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고 있었다. 당 제국으로서는 이른바 비단길로서 동·서양을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교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나라의 국운은 바로 이 교역로에 달려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당은 안서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의 4개의 도독부를 두어 변방을 통치하였으나 티벳 고원에서 거주하던 토번인들은 비단길로 향한 야욕이 컸으며 이들은 페르시아의 사라센 제국과 손을 잡고 당과 대결하여 서역을 지배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747년 당 현종은 안서 4진을 방어하고 있던 도지병마사 고선지 장군에게 토번국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보병 1만을 이끌고 토번국을 치기위한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고선지가 이끄는 군대는 초인적인 강행군을 펼쳐 오식익국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동무 쉬먼 지방에 위치했던 부족국가였음. 양대규, 고선지장군 서역대원정 연구 (대륙연구소, 1995)
에 달하였으며 토번국의 군사요새인 연운보를 공격하기 위해 부대를 편성하였다. 고선지는 연운보를 기습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남쪽으로 향하여 힌두쿠시 산맥을 돌파하였는데 이 당시 부친 고사계 장군을 포함한 8백여 명의 부하들이 눈사태를 만나 떼죽음 당하였다. 그러나 고선지는 이에 연연하지 않고 아노월성을 공격하여 토번국 세력을 축출하게 되었으며 서역일대 실크로드 주변의 대식국(아라비아, 사라센 제국)등을 포함한 72개의 크고작은 국가들이 대당제국에 귀순할 것을 맹세하였다.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고선지는 당 현종에게 ‘홍려경어사중승’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고선지 장군의 명성은 시리아와 터키 및 아랍제국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이후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로 승진되어 당나라 서역지방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다시 원정길에 나서게 되는데 사라센의 아부 무스림 장군과 대적하게 된다. 이들은 타라스 대평에서 만났으며 당의 군대와 사라센 제국 동맹군은 대공세를 펼쳤다. 당나라 군대는 자신들의 영토에 복속되어 있던 카를루크 족의 기습을 받아 크게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크게 패배하게된다. 이를 탈라스전투라 부른다. 탈라스 전투의 패전으로 서역제국을 장악했던 당나라의 자존심은 크게 무너졌으며 고선지 장군이 이룩해 놓은 서역제국의 지배권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군사들이 사라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안서로 복귀한 고선지는 관직에서 해임당하게 되었다. 결국 고선지는 ‘반군의 진압을 회피하고 조정의 재산을 횡령한 죄인’으로 몰리게 되면서 고선지 장군과 부장 봉상청은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고선지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그를 따랐던 충성스런 부하들은 망국민의 원혼을 달래고자 그의 시신을 옛 고구려 땅으로 옮겨 돌성을 쌓아 모셨으며 후일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고선지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오랫 동안 봄과 가을에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모셨으며 이 제삿날에는 인근에 사는 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의 변방 절도사로 있으면서 고구려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인류 역사에 미증유의 대기록을 남겼음에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물론 우리 민족사에서도 외면하였기 때문에 1천2백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설같은 야사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고대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에 일부 전해지고, 당나라의 「고선지전」에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의 몇몇 고고학자들에 의해 수천 년 동안 묻혀있던 서역지방에서의 고선지 업적이 발굴되어 학계에 보고되면서 동·서양 사학계의 눈부신 각광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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