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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체 제구 축기 1905~1919의 친일파와 그 논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배체제 구축기(1905~1919)의 친일파와 그 논리
일제의 동화주의적 식민정책과 친일파 육성
1) 일제의 동화주의적 식민정책론
일본의 조선지배는 처음부터 조선의 실상을 왜곡하고, 낙후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은 물론 조선일본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좁게는 조선의 문명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는 이른바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이라는 침략이데올로기로 확립되었다.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대륙침략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제기된 것이다. 일본은 서구문명을 지향하는 문명개화를 추진하면서 스스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중국과 조선의 후진성을 부각시켰다. 이 우월의식과 경멸감은 일본인에게 아시아의 지도자라는 의식을 고취시키고 미개한 아시아를 지도하기 위해 이를 지배해야 한다는 이른바 동아맹주론(東亞盟主論)으로 발전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착착 진행하면서 언제나 동양평화론과 조선의 시정개선론을 구실로 내걸었다. 동양평화론은 또한 ‘조선의 시정개선(施政改善)’. 곧 조선의 내정개혁문명개화와 결합되어 있었다. 조선의 문명화되지 못하여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면 곧 동양의 평화가 저해된다는 것이었다. 정치개선, 교육보급, 식산흥업 발전 등의 ‘시정개선’을 통해 한국의 문명화는 물론 동양평화까지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침략의 명분은 강제적인 ‘합방’을 단행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합방’으로 동양의 화근(禍根)인 조선문제를 해결하여 동양의 평화를 안정유지할 수 있고, 또한 산업과 무역의 발달을 통해 조선민의 행복 증진을 위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친일파 육성
일제는 동화주의라는 식민지배 명분론을 선전하기 위하여 친일세력을 육성하고 이용하였다. 장기적으로는 민족을 분열시키고 또한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친일파의 세 부류
①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군부와 우익단체들의 조종과 원조에 의해 활동하였다. 송병준,윤시병,유학주,염중모 등을 포섭하여 만든 것이다. 이용구의 진보회와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②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이완용, 조중응과 같은 고관들로 이들은 이토와 통감부 당국에서 직접적으로 원조하고 이용하였다.
③ 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는 적극적인 합방론이 반일운동을 격앙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합방에 소극적인 인사들을 내세워 일본유학생이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양평화론, 삼국연대론 등을 유포시켰다.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1910년대 초기에 친일파가 되었던 것은 바로 계몽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개량적인 성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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