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형성과 친일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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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의 형성과 친일의 논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여 1945년 쫓겨나기까지 근 40여 년 동안,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지지배에 적극 협력하여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을사조약(1905년) 체결에 협조하는가 하면 통감부에 의한 ‘보호정치’ 아래서 관료로서 혹은 일진회처럼 일제의 주구로서 한국병탄에 적극 협조하는 자도 있었다. 1910년 나라가 병합 당할 때 매국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제가 주는 작위나 하사금을 기꺼이 받아 들여 특권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하는 자들도 있었다.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민족지도자로 행세하다가 일제의 회유, 매수, 공작에 넘어가 반민족 행위를 하는 변절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민족의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 교육을 철저히 받아 일제의 군인관리나 주구가 되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전쟁강제동원에 앞장서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통상 친일파라고 한다. 즉 특정한 시기에 일본의 한국침략에 편승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에게 고통을 가한 무리들을 말한다.
친일파의 형성과정
1.1920년대 사상의 배경
1910년대 들어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신 지식층들의 ‘선실력양성론’과 국내 일부 지식인들과 망명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혼유지론’‘무장투쟁론’으로 계승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는 결국 이들 신 지식층들로 하여금 다른 돌파구를 찾게 하였고, 여기서 그들은 1918∼19년을 전후한 세계정세의 급변을 맞이하여 3·1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에 의해 제창된 민족자결주의와 그에 이은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 고조, 그리고 제1차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전개된 러시아혁명·독일혁명 등은 이들 신 지식층으로 하여금 이 시기를 세계사의 커다란 전환기라고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3·1운동과정을 통하여 이들 신 지식층은 세계는 정의와 인도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회진화론에서 말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본래의 실력양성론으로 다시 돌아가 1920년대 초반 이른바 ‘문화운동’이라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0년대 초반의 문화운동
3·1운동 직후 일제의 새로운 식민지 지배정책인 ‘문화운동’이란 청년회운동·교육진흥운동·물산장려운동 등 ‘문화적 실력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상당기간 동안 국내외에서는 ‘절대독립론’과 ‘국외에서의 외교운동-국내에서의 만세시위운동 연계론’이 사그러지지 않았다. 이러한 운동론은 모두 미국 등 서구열강의 한국독립에 대한 지원기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이와 관련된 움직임이 세 차례 일어났다. 즉 1919년 가을 미국에서 열린 국제연맹 제1차회의, 1920년 여름의 미하원의원단의 한국방문, 1921년 말의 워싱턴회의(태평양회의)가 있었던 시기에 국내에서는 이와 관련한 시위 등 각종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미국 등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여기서 남의 힘에 의존하는 독립운동을 일단 단념하고 자력을 키우는 실력양성운동이 먼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실력양성운동론은 민족자본가계층의 동요에 그 사회·경제적 배경을 두고 있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일본자본주의의 본격적인 진출과 조선인 부르주아의 일정한 육성을 위하여 회사령을 철폐하였다. 이에 따라 1919∼20년경 조선인들 사이에 각종 회사설립의 열풍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자본, 부족한 기술인력으로는 일본자본주의의 물결을 당해낼 수 없어 다수의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적자에 허덕이면서 ‘동요’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민족자본가들은 총독부측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보호관세제도의 실시, 기업보조금의 지급 등 조선인 중심의 산업정책을 호소하였다. 총독부측은 조선산업조사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이를 거부하고, ‘일선(日鮮)의 관계연락(關係聯絡)’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적 산업정책을 재확인하였다. 민족자본가들은 더이상 총독부측에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실력양성론을 앞세워 ‘민족자본의 보호’를 민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해보려 하였다. 1920년대 초반 실력양성운동론은 이들 민족자본가계급의 사회·경제적 입장을 대변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초반의 문화운동은 이 시기 유행한 ‘관념론적인 개조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때 개조론은 흔히 ‘정의 인도’‘자유 평등’으로 표상되는 문화주의·민중주의·노동본위주의·남녀평등주의 등의 이념 위에 서 있었다. 이러한 개조론은 1920년 말경부터 민중주의·노동본위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개조론과 문화주의를 강조하는 관념론적 개조론으로 점차 분화되었는데, 문화운동은 이 관념론적 개조론의 영향 하에 진행되었다. 문화주의는 곧 인격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즉 문화는 교화(敎化)·계몽·인격완성 등의 의미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화주의를 인격주의(人格主義)로 이해하는 것은 조선의 신 지식층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문화운동에서 인격완성(수양)과 정신개조가 크게 중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0년대 초반의 문화운동은 신문화건설·실력양성론, 정신개조·민족개조론을 그 이론적 기초로 삼고 있다. 문화운동 초기에 제창된 ‘신문화건설론’은 세계개조의 시대적 기운에 부응하여 조선에서도 신문화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신문화건설이란 ‘현대적 문명수립’이라고 막연하게 표현되었지만, 그 내용은 점차 사회적 측면에서의 봉건적 잔재의 청산, 경제적 측면에서의 낙후된 생산력의 증진 등 자본주의적 문명의 수립을 뜻하는 것으로 분명해졌다. 이때 현대적 문명수립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교육과 실업의 발달, 그리고 구습(舊習)의 개량 등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