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답사 광릉과 현등사 현등사 삼층석탑

 1  겨울 답사 광릉과 현등사 현등사 삼층석탑-1
 2  겨울 답사 광릉과 현등사 현등사 삼층석탑-2
 3  겨울 답사 광릉과 현등사 현등사 삼층석탑-3
 4  겨울 답사 광릉과 현등사 현등사 삼층석탑-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겨울 답사 광릉과 현등사 현등사 삼층석탑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겨울답사
1. 광릉(光陵)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 있는 조선 제 7대왕 세조와 정희 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으로 사적 제197호이다. 1468년(세조 14)과 1483년(성종 14)에 축조하였다. 이 능은 세조가 “원릉의 석실은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상을 연꽃봉오리가 봉긋한 난간동자석주(欄干童子石柱)에 옮겨 새겼다. 회격으로 바꿈으로써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다. 또 능을 홍살문 하나 정자각(丁字閣) 하나를 두고 능선이나 골짜기 하나를 떨여뜨려 배치하는 동원이강(同原異岡,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의 형식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이로써 국초 왕릉제의 일대개혁을 이루었다. 또한 광릉은 곡장 대신 아담한 담을 둘렀으며 영(令) 1인과 참봉 1인을 두었다.
2. 현등사(懸燈寺)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운악산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산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 법흥왕 때에 인도승 마라하미(摩羅訶彌)가 포교차 신라에 왔으므로 왕이 그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산이름을 운악산이라 하였으나, 창건 당시의 사찰명은 전하지 않는다. 그뒤 수백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 신라말에 고려가 개경에 도읍을 정할 것을 미리 안 도선이 송악산 아래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세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완공 뒤 지세를 살펴보니 동쪽이 허하였다. 이를 보진할 땅을 찾아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운악산의 옛 절터에 이를 중창하였다.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주춧돌만 남은 절터의 석등에서 불이 꺼지지 않고 있음을 보고 중창하여 현등사라 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보조국사가 도봉산 원통암에 있을 때 동방에서 3주야간이나 빛을 발하고 있었으므로 이곳까지 찾아왔더니 잡초 우거진 곳에 관음당(觀音堂)이 있었고, 그 곁의 석등으로부터 빛이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뒤 1411년(태종 11년)에 함허화상이 삼각산에서 오신산으로 가다가 이 부근에서 길을 잃었는데, 홀연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흰 사슴은 온데 간데 없고 그곳에 옛 전각지가 있었으므로 크게 중건하였다. 그때 3대군(大君)의 원당(願堂)을 삼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승당(僧堂)과 관음전이 소실되고, 불상위실(位室)청심당(淸心堂)양로방(養老房)만이 남았는데, 이듬해 구암(龜巖)과 취윤(就允)과 원빈(圓彬)이 요사채와 동서누각극락보전삼보방(三寶房) 등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극락전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보광전, 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전내에 봉안된 아미타불은 1759년(영조 35)에 조성된 높이 108cm의 좌상이다. 문화재로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3호인 삼층석탑과 함허대사부도탑지진탑(地鎭塔) 등이 있다. 이 중 삼층석탑은 신라말 도선이 창건주 아라하미를 위하여 조성한 탑이라고 전해오는데, 양식상으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3.7m의 탑이다. 또한, 함허화상부도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지진탑은 보조국사의 사리탑이라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다. 이밖에도 조선 중기의 뛰어난 도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부도가 있고, 인진왜란 전에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국교 교섭의 선물로 보낸 금병풍(金屛風) 1점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나 6.25 때 분실되었다.
▷현등사삼층석탑(懸燈寺三層石塔)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현등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높이 3.7m,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3호로 원래는 오층석탑이었으나 2층의 옥개석과 옥신석이 없어졌다. 자연의 너럭바위를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4각 하대석과 낮은 상대중석에다가 두꺼운 상대갑석으로 기반부를 이루고 있다. 아무런 새김이 없는 4각 옥신 위의 1층 옥개석은 상대갑섭보다 넓으나 2층 부터는 옥신과 옥개석의 크기가 차차 작아졌고, 각 옥개석은 네 귀가 들리고 반전이 큰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보조국사의 삼층석탑이라고 전해지나 어느 시기에 세워진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성연대가 1470년I(성종 1)임을 알리는 명문의 사리용기가 탑에서 발견되었다.
▷지진탑(地鎭塔)
‘가평 하판리 지진탑’이라 명명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이다. 탑은 본래 법당 앞에 세우는 게 일반적인 가람배치인데, 절마당 석축 끝에 세워진 까닭은 보조국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지기(地氣)를 주르기 위해서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디 삼층석탑인데 기단 일부가 땅에 묻혀 있고 1층 몸돌과 상륜부가 없어지고 지붕돌의 파손이 심해 제 모양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석탑 앞에 신라 말 이후에 나타나는 양식의 우주와 탱주를 새긴 배례석이 있고, 위로 치켜올라간 지붕돌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엽에 조성된 탑으로 추측한다.
3. 삼막사(三幕寺)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삼성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이 절은 677년(문무왕 7)에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潤筆) 3大師가 관악산에 들어와서 막(幕)을 치고 수도하다가, 그뒤 그곳에 절을 짓고 삼막사라 하였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원효가 창건하고, 신라말에 도선(盜詵)이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개칭하였는데, 고려의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1348년(충숙왕 4)에는 나옹(懶翁)이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하였고, 1394년(태조 3)에는 왕사 무학(無學)이 이 절에서 국운(國運)의 융성을 기원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398년 왕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뒤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1880년(고종 17)에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을 지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 지칭하였는데, 이 절이 남서울의 수찰(首刹)이자 서울 주변의 4대 명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망해루(望海樓)대방(大房)요사칠성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석조기둥으로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양식의 건물이며, 내부에 봉안된 탱화와 범종은 광무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인 망해루는 청명한 날 서쪽을 바라보면 서해가 보인다고 하여 망해루라 일컬었다. 또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십대왕(十大王)판관 등의 상이 모셔져 있는데, 십대왕상은 이 사찰의 보물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높이 2.55m의 삼층석탑과 조선 정조 때의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전설을 지닌 거북모양의 감로정석조(甘露井石漕)가 있으며, 자연암석에 양각한 아미타삼존불이 있다.
▷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
경기도 안양시 석수1동에 있는 남근석 1기와 여근석 1기를 일컫는 것으로 경기도민속자료 제3호이다. 인공을 가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남근석은 높이 150cm이고, 여근석은 높이 110cm이다. 속전(俗傳)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7년 원효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바위들이 신앙대상이 되어왔다고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순조로운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 및 수명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4월 초면 경향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을 켜고 또 삼색 과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
▷삼막사동종(三幕寺銅鐘)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삼막사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의 범종으로 1625년 작품이다. 높이 102cm, 입지름 61cm로 정상 부분에 2마리의 용이 서로 맞대고 있는 용뉴(龍)를 갖추었고 음관(音管)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상대(上帶)에는 2행의 범자(梵字)가 둘러져 있으며(이것은 조선 후기의 범종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하대에는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상대 밑에는 상대와 바로 붙여 유곽(乳廓)을 네 군데에 설치하였고, 그 안에는 각각 9개의 유두(乳頭)가 배치되어 있다. 이 유곽 아래에는 보살상(菩薩像) 4구와 위패형(位牌形)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 화주(化主)의 이름 및 주조연대 등을 명기하고 있다. 비교적 대종에 속하는 것으로서 조선 중기 범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막사마애삼존불상(三幕寺磨崖三尊佛像)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관악산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안에 새겨진 조선시대 마애삼존불상으로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4호이다. 바위에 치성광삼존불상(熾盛光三尊佛像)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 석가모니의 법을 펴는 화신으로 모공(毛孔)에서 광영을 발하므로 붙 여진 이름이다. 치성광여래의 좌우 협시는 일광월광보살이다.
을 새기고 전면(前面)에 걸쳐 누각식 목조전실(木造前室)을 구축하여 법당으로 삼았다. 현재 전실의 1층에는 아무런 시설을 만들지 않고 2층에 마애삼존상이 안치되도록 한 것으로 이런 구조는 석굴사원의 전실(前室)로 흔히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유구는 석굴사원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큼직한 감실(龕室, 너비 250cm, 깊이 200cm)을 파고 여기에 삼존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본존상(높이 150cm)과 협시보살상(높이 93cm)은 다소 등신대(等身大)보다 큼직하게 새겨졌지만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즉 머리의 육계는 뽀족하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방형(方形)으로 평판적이지만 다소 양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좁아진 어깨, 방형의 체구 등도 역시 평판적으로 처리되어 조선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통견(通絹)의 법의(法衣)는 두껍게 나타내어 불상의 부피감을 감소시키고 있으며, 간결한 옷주름선은 도식적으로 처리되어 불상의 형태와 잘 대비되고 있다. 두 손을 배에 대어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는데 이것은 치성광불의 보륜(寶輪)으로 생각된다. 좌우협시보살상들은 일광(日光)과 월광(月光)이 표현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머리나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수인 등이 보살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삼존은 날카로운 연꽃무늬 대좌가 받쳐주고 있다. 본존불의 보륜수인과 좌우 보살상의 일광월광상의 특징은 칠성각에 본존으로 봉안된 형식과 더불어 칠성의 본존불인 치성광삼존불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佛畵)로서 치성광후불탱은 괘 남아 있으나 마애불상으로서는 극히 희귀한 예이므로 크게 주목된다. 뿐만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