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 관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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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관념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버클리 관념론
근대 경험론의 핵심적인 인물로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연대기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그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사이에 있다. 로크는 버클리가 비판하게 될 상식적인 주장을 정립한 사람이며, 흄은 버클리의 상식 밖의 주장을 더 철저하게 밀고 나간 사람이다. 버클리는 아일랜드 사람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도시 버클리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며 또한 미국 예일 대학교에 있는 버클리라는 단과대학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이렇게 미국의 도시와 예일 대학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된 까닭은 그의 선교 열정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위 버뮤다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것인데, 당시 버클리가 보기에 영국은 영적으로 타락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버클리는 버뮤다에 대학을 세울 계획을 짠다. 그리고 스스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으로부터 약속 받았던 자금 지원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버클리는 성공회 주교가 되어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간다. 철학자로서 버클리를 유명하게 만든 책은 대부분 20대 중반에 쓰인 것이다. 그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끝에 1709년 발표한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1]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 그의 결론은 기초적 광학이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상하게도 60대 버클리 주교는 다소 엉뚱한 일에 몰두한다. 당시 그는 타르-물(tar-water)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의 과학적 근거를 밝히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 결과 출판된 책이 버클리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시리스Siris』다.
한편 버클리의 철학적 주장이 담긴 책으로는 [인간 지식 원리론(Treatise concerni 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과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Thr 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철학적 주장은 상식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이런 점이 오히려 버클리 철학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왜 그가 그런 생각을 했는가다.
그럼 도대체 버클리의 상식 밖의 주장은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된다. 데카르트에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 m.)’가 있다면, 버클리에게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가 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말은 ‘지각되는 것만 존재한다.’, 혹은 ‘지각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선 ‘지각(perception)’이란 말을 이해하자. 어렵지 않다. 그냥 감각 기관을 통해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시각만을 생각해보자. 아주 거칠게 말해, 시각이라는 지각은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각된 것만 존재한다.’,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 ‘보이는 것만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결국 버클리가 주장한 ‘Esse est percipi.’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버클리의 철학적 주장이 담긴 [인간 지식 원리론].
그럴싸한가? 상식적인 주장처럼 들리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당신이 사용하는 컴퓨터 속에는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뿐이다. 당신은 지금 마더보드를 보고 있지 않다.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자. 그럼 당신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니터뿐이다. 당신의 컴퓨터 속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등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 이상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른한 오후다.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잠이 쏟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 바로 앞자리에 고약한 부장이 앉아 있다. 속으로 생각한다. “부장만 없다면 한숨 푹 잘 텐데.” 버클리라면 당신에게 어떤 조언을 할까? 단순하다. “눈 감아!” 버클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눈을 감으면 앞에 있는 고약한 부장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편하게 잠들면 된다. 물론, 당신이 눈을 뜨는 순간 부장을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욱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다. 신장이나 간과 같은 장기를 이식 받았을 때, 나의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이식 받기 전이나 이식 받은 후나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성립하지 않는 장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뇌다. 뇌를 이식했다고 생각해보자. 뇌를 이식받기 전과 이식 받은 후는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럽다. 이런 이유에서 뇌는 나의 정체성의 핵심적인 요소다. 즉 뇌가 달라진다면 나도 달라진다. 이제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뇌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나의 뇌를 본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버클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뇌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주장이 얼마나 상식 밖 주장인지는 이 정도의 설명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버클리의 말이 단지 장난스러운 궤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보다 자신의 주장이 훨씬 더 상식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버클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분명히 무언가 놓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제 버클리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약간의 섬세한 사고가 필요하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를 보고 있다.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답은 당연히 컴퓨터인가? 그러나 이 답은 애매하다. 당신은 컴퓨터라는 어떤 기계 덩어리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눈에 맺힌 컴퓨터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가? 당신이 지금 TV 버라이어티 쇼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금 개그맨 유재석이 나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재석인가, 아니면 유재석이 비친 TV 화면인가? 당연히 당신은 유재석 그 자체가 아니라 유재석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를 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보고 있는 것은 컴퓨터 그 자체가 아니라 컴퓨터가 눈에 맺힌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그런 이미지와 같은 것을 철학적 용어로 표상(representation) 혹은 관념(idea)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우리의 지각은 두 가지―표상(혹은 관념)과 그것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부 대상―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듯이 보인다. (물론,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각하는 주체, 즉 나다. 버클리는 이런 지각 주체의 존재 역시 인정한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고자 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거나 지각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aut percipere.)’로 바뀌어야 한다.)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다시 버클리의 생각으로 돌아가자. 그는 ‘보이는 것만 있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표상 혹은 관념이다. 따라서 버클리의 주장은 ‘표상(혹은 관념)만 있다.’, ‘표상(혹은 관념)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이 된다. 위에서 지각은 외부 대상과 표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즉 둘 다 있다는 것이 우리 상식과 일치한다. 하지만 버클리는 표상이 아닌 것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외부대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외부대상과 표상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당신과의 관계다. 당신 앞에 당신의 연인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고 하자. 그리고 반복적으로 눈을 깜박거려보자. 분명 무엇인가는 계속 있고, 무엇인가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다행스럽게도 사랑스런 당신의 연인은 당신이 눈을 감든, 뜨는 상관없이 당신 앞에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눈을 감으면 사랑스런 연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을 뜨면 사랑스런 연인의 모습은 나타난다. 표상은 당신 연인의 모습에 해당한다. 그리고 외부대상은 당신의 연인 그 자체에 해당한다. 표상과 외부 대상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당신에 의존하는지 여부다. 당신의 연인 그 자체의 존재는 당신에게 의존하지 않지만, 연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당신에게 의존한다. 철학에서는 당신과 같이 지각하는 것을 지각 주체라고 부른다. 그럼 우리는 표상은 지각 주체에 의존하지만, 외부대상은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버클리가 외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듯 지각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각 주체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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