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주의 연출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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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주의 연출가들:
1917년 혁명은 러시아의 과거와의 단절을 신호해 주었지만 새로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한동안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에 전념했기 때문에 1920년대 말까지는 연극에 획일성을 강요하려고 들지 않았다. 혁명의 지지자 중 다수가 미래주의 자거나 전위운동의 멤버로서 그들은 과거와 완전히 절교하고 새로운 예술형식을 창조할 수 형식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로서 새 정권을 환영했다. 이 집단 중에 브세벨로드 메이어홀드가 연극의 지도자가 되어 1930년경까지 같은 위치를 유지했다. 러시아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스탄니슬라브스키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예술원칙에 반기를 들었다. 그중에서 메이어홀드가 가장 유력했다. 스탄니스라브스키가 심리주의에 기초한 사실주의 연기를 개발한 금세기 최고의 이론가라면 메이어홀드는 외적인 ,반사실주의 운동 영역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1902년부터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1917년까지 메이어홀드는 숱한 상징주의 드라마를 무대화하면서 반사실주의 실험을 계속하였다. 그 후 여러 극단에 초청되었지만 얼마 안 지나서 그는 극단을 떠난다. 그는 주연급 배우가 아닌 연출가가 가장 중요한 연극 예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후 10년 동안 그의 공연은 점점 양식화와 극장주의 경향을 강하게 지향했다.
러시아 연극에 있어서 그가 갖는 중요성은 혁명이후 분명해졌다. 1919년부터 1930년까지 그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장주의자 가 되었다.1920년대에 < 멋지게 오쟁이진 남편> < 검찰관> 등의 공연을 통해 유명한 반사실주의 실험에 착수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연출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정부의 지탄을 받았다. 정부는 그가 양식화된 실험을 철퇴해주기를 바랐으나 그는 오히려 소비에트의 규제를 받고 있는 극장 예술을 공격함으로써 체포 되었다.그는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은 뒤 1040년에 처형당했다.
메이어홀드의 초기 극장주의 수법의 공연작품인 몰리에르의 Don Juan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공연은 시종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마이어홀드는 앞 무대를 객석 깊숙이 파고 들어가도록 했고 면막(面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 객석의 등을 켜 두었으며 흑인 소년들이 등장하여 소품과 가구들을 나르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촛불을 불어 끄기도 하고 연극의 시작과 휴게 시간 등을 알리는 종을 쳤다. 그리고 두 사람의 프롬프터가 무대 양끝에 시종 나와 앉아 있었다.
열렬한 공산당의 지지자로서 메이어홀드는 공산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이상 사회의 비전을 펼쳐 보이기 위한 도구로서 연극을 추구했다. 그는 무대와 실제 인생을 분리하는 사실주의 연극의 재현적(再現的 )방식은 중·상류 계층에 의하여 지배되던 사회의 산물로 보았다. 따라서 계급이 타파된 새 사회의 연극은 무대와 인생(곧 관객)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연극관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독창적인 방법론을 개발해 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생체역학’(生體力學)이론에 입각한 배우훈련의 체계이다. 이것은 배우의 내면적 느낌을 강조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거부하고 원초적인 자극과 반응을 중시했다. 그에 의하면 배우의 임무는 극중인물의 내면세계를 재창조하여 그 인물처럼 말하고 행동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명민하게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연극의 연기술, 동물의 동작, 곡예, 운동경기, 기계체조 등이 연기자들의 신체를 단련하여 연기 표현을 위한 능률적인 기계가 되도록 하는데 이용된다. 마이어홀드는 협동, 숙련, 능률 등으로 상징되는 산업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형을 무대 위에 표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연기에 있어서의 생체역학은 무대 장치에 있어서 그가 시도한 구성주의(構成主義)와 긴밀한 관련성을 가진다. 구성주의에 의하면 무대장치 역시 연기를 전시하는 도구이어야 하며 사실적이거나 분위기를 표현한다거나 또는 장식적인 기능을 가져서는 안되고 다만 기능적이어야 한다. 장치는 다만 덧마루, 경사마루, 계단 등의 기본적인 요소만으로 이루어져서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능케 하는 구실을 하면 족하다. 그리고 이 같은 구조물들의 조립 상태를 구태여 은폐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놓음으로써 그것이 무대장치임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도록 방치한다.
마이어홀드의 연극은 연극이 연극임을 노출시킬 뿐 아니라 관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기도 한다. Carter는 이에 대해 “마이어홀드는 스타니슬랍스키에 있어서 관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마이어홀드는 관객을 발견했고 이 발견이 그를 무대의 중앙으로부터 객석의 중앙으로 옮겨가게 했다”라고 말했다. 마이어홀드의 연극에서는 배우가 오토바이를 타고 객석 통로로부터 등장하기도 하며 휴게 시간을 알릴 때 배우가 앞 무대로 나와 객석을 향해 직접 외치기도 한다.
마이어홀드의 대표적인 연출작품은 1926년에 공연된 고골의 (檢察官)인데, 이 작품은 니콜라스 1세 치하의 제정 러시아를 통렬히 풍자한 것으로 15개의 에피소드로 재구성되었다. 무대는 경사진 높은 단을 깔고 뒷면에 열 다섯 개의 문이 달린 스크린이 둘러쳐져 있다. 이 문들이 동시에 열리면서 열한개의 팔이 나와 검찰관에게 뇌물을 바치는 장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중앙 문을 통하여 바퀴 달린 단이 굴러 나오고 단 위에는 정지된 모습의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단이 멈추면 비로소 연기를 시작하며 퇴장할 때에도 똑같은 절차를 밟는다. 배우들은 때로 집단으로 대사를 하기도 하며 대사를 할 때에는 음악적 리듬에 따라서 한다.
메이어홀드와 쌍벽을 이룬 또 한 사람의 극장주의 연출가로서 알렉산더 타이로프(1885-1950)가 있다. 타이로프는 모스크바의 카메르니 극장을 1914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끌었다. 그는 예술과 인생은 서로 무관하며, 연극은 고대 신전의 성스러운 춤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대본은 창조를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푹스처럼 리듬을 연극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였으며 마치 음악을 작곡하듯 그의 지휘하였다. 대사는 열변과 노래의 중간이었고 동작은 언제나 무용 쪽으로 기울었다. 전체적인 효과는 상식적인 연극 공연보다 종교의식에 더 가까웠다. 리듬을 강조하였기에 무대장치는 동작과 템포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주로 계단과 수평면으로 구성되기 일쑤였다. 그는 통일성의 기준을 인생에 두지 않고 연출가의 창조적인 상상력에 두었다. 타이로프는 마이어홀드와는 달리 배우를 기계나 인형으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구성주의적 무대장치는 즐겨 원용했다. 그의 연극은 서커스, 판토마임, 뮤직 홀 등의 수법을 골고루 동원하여 쉴 새 없는 동작과 소리의 연속을 보여줌으로써 공연 전체가 눈과 귀를 황홀하게 만들어 주는 고도로 세련되고 뛰어난 극적 체험이 되게 하였다.
또 한 사람의 소련 연출가인 에프게니 박탄고프(1831~1922)는 극장주의 노선을 걸으면서도 마이어홀드와는 달리 심리적 진실에 바탕을 둔 감정에 의하여 배우의 동작과 화법을 내면적으로 정당화해야 한다는 스타니슬랍스키의 믿음을 거부하지 않았다. 스타니슬로브스키로부터 그는 주의 집중에 대한 강조, 각 등장인물의 자서전을 답사하는 것, 그리고 숨은 의미를 찾기 등을 계승하였다. 그는 마이어홀드의 독창성에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적 연기를 결합하였다. 그는 그의 이런 접근법을 라고 했다. 그는 배우들에게 무대위에서 하는 일체의 행동을 정당화할 것을 주장하였기에 그의 작품은 항상 통일되어 있고 조리 있게 보였으며 그 점은 작품이 전통적인 양식을 벗어날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이어홀드 같은 과격한 극장주의자는 사실주의를 격렬히 비난했으나 공격의 표적은 주로 사실주의의 ‘제4의 벽’ 이었고 극장주의 연극 자신이 사실주의에 대한 ‘부분적’ 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극장주의가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사실주의 역시 예술창작의 방식이라고 했을 때 Lewis의 말대로 “확실히 사실주의 또한 형식이다. 곧 극장적 형식 중의 하나이다. 사실주의 희곡과 공연에 있어서도 무대 위에 올려진 인생은 꾸며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형태가 부여되어진 것이다.” 또 극장주의도 결국은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다만 극장성의 목적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려는 것이다. 곧 ‘예술의 리얼리티’를 무대 위에 실현하려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이와는 달리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리얼리티의 추구에 있어서 양자는 일치한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1920년대 말에 메이어홀드와 타이로프 같은 혁신가들은 인민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소베트 정부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이념의 매개로서, 그리고 문화적 성취의 전유물로서 러시아 사회의 중심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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