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영성 - 탕자의귀향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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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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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렘브란트의 영성
(바라봄과 고난의 승화)
-’탕자의 귀향’을 중심으로
렘브란트의 영성(바라봄과 고난의 승화)
-목차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
렘브란트의 생애
헨리 나우웬의 생애
렘브란트와 헨리 나우웬의 만남
탕자의 귀향
글을 마치며
참고문헌/자료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
렘브란트의 신앙-렘브란트의 부모는 종교적 확신에 뿌리내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생활이며, 성경은 정신적 고향처럼 여겨졌다. 어머니는 렘브란트의 영적인 성장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라틴학교와 라이덴대학에서의 교육과 훈련 또한 렘브란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철저한 기독교 생활과 칼빈의 참된 종교적 지식은 중요한 신앙적, 지적 배경이 되었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종교개혁과 더불어 17세기는 회화 부분에서 기독교적 주제가 중요한 비중을 잃고 있었다. 회화예술이 종교에 봉사하는 어떤 권리도 부정하는 칼빈의 영향으로 교회 회화란 더욱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렘브란트는 평생 그린 작품의 3분의 1 가량이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다. 성경의 애독자인 렘브란트는 성경의 사건들을 기독교적 통찰력을 담아 내면화하여 자기 고백이요, 증언으로써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키에르케고르의 일기만큼 경건한 기록이다.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 나타난 성경은 성경의 기록과 또 그 기록을 대하는 그 시점에서의 그의 생의 상황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늘 새롭게 변화되어 한 계기로써 발현되는 성경이었다.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을 소박하고 외면적인 방법으로표현하여 ‘경건성의 사실주의’를 지향하였다.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
고난과 싸워 이긴 극복의 자취들을 화폭에 담았다. 렘브란트에게 고난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그처럼 심오하게 인간을 이해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탄생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행했던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의작품은 확고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경건과 은혜로 충만하다.
‘개신교의 위대한 화가’란 이름을 들을 만큼 믿음의 눈으로 그림을 그렸다. 평소 렘브란트를 흠모해온던 고흐는 그의 그림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고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언급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성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는 일종의 설교자였다.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그 속에 내재한 진리에 관해 상고하였으며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 그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의 초상화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단순한 마당이었을 뿐 아니라 스토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의미를 지녔다. 넓은 의미에서 그는 성서의 영적인 진리와 권능과 교감하기를 바랐고 이와 같은 교감을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추구하였다.”-Tony Maan
렘브란트와 그의 그림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보통 ‘고요한 내향성’으로 특징지어 왔다. 이 말은 렘브란트의 첫 옹호자 세대에 속했던 괴테 이래 줄곧 언급되어온 표현이다.
색채는 그에게서 영혼을 표현하는 주요 수단이며 빛깔은 내면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려진 것처럼 진솔한데 그와 같은 정신성을 지닌 색채는 후기에 와서 보다 더 중후해진다. 색채가 낼 수 있는 표현적 가능성을 그처럼 효과적이고 찬란하게 보여준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
렘브란트의 생애(1606~1669)
1606년 출생: 네덜란드의 비텐스테크에서 제분업자 하르멘 게리쯔와 빵 제조업자의 딸 코르넬리아 사이에 낳은 열명의 자식중 아홉번째로 태어남
1613-1620: 부모는 렘브란트를 프로테스탄트 학교인 라틴어학교에 진학시킴.7년간 교육을 받고 1620년 다시 라이덴 대학 철학과에 입학시켜 고전을 배우게 함
1620-1624: 단기간 라이덴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중단하고 이탈리아에서 훈련받은 화가 야곱 이삭(Jacob Isaacsz) 아뜰리에에 등록. 얼마 후 암스테르담의 역사화가 피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6개월간 있었는데 이때 라스트만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1625-1628: 라이덴으로 돌아와 얀 리벤스와 함께 스튜디오를 세움.
1628년(22세): 총독의 개인비서였던 영향력 있는 콘스탄테인 후이겐스(Constantijn Huygens)가 렘브란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큰 관심을 표시. 후이겐스는 렘브란트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1629-1630: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렘브란트의 작품을 구입
1630년(24세): 부친 사망
1631년(25세): 암스테르담에 이주
1632년(26세): 외사의사 를 의뢰받음
1633년(27세): 암스테르담 화상의 조카이자 시장의 딸 사스키아와 약혼
1634년(28세): 사스키아와 결혼. 같은 해 스튜디오를 짓고 제자를 가르침. 야곱 벡커(Jacob Backer), 고바르트 플린크(Govaert Flinck), 페르딘난트 볼(Ferdinand Bol) 등 학생을 지도하였는데 이들은 후에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1636년(30세): 분수에 넘치는 수집이 시작되어 사치품, 골동품(이국물건,과학 및 역사적 물품들, 동식물 박제)을 구입하다.
1638년(32세): 사스키아 사이에 낳은 딸 코르넬리아 사망
1639년(33세): 예수 수난 시리즈 총 5점을 모두 완성, 요덴 브레스트라트에 호화주택을 구입
1640년(34세): 첫째 딸과 같은 이름의 둘째 딸 코르넬리아가 태어난 지 얼마 안 있어 사망. 한 달 뒤 모친 사망
1641년(35세): 아들 티투스 출생
1642년(36세): 부인 사스키아 사망하면서 위기가 시작되다.
1645년(39세): 가정부 헨드릭게, 헤이르체가 들어오다
1649년(43세): 티투스를 돌보아주기 위해 들어온 다른 한 명의 보모 헤이르체 디르흐(Geertje Dircx)와 다툼이 잦아지면서 두 사람의 문제가 법정으로까지 가게되었는데 헤이르체가 패소, 결국 그녀는 몇 년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1653년(47세): 애호가들의 주문, 학생들의 수업료 등에도 불구하고 부채를 갚을 길이 없어 돈을 빌려 씀
1654년(48세): 헨드릭게가 암스테르담의 개혁교회 위원회로부터 소환을 받음. 헨드릭게 사이에 낳은 딸 코르넬리아가 태어남
1656년(50세): 지불불능으로 파산선고를 받음
1658년(52세): 재산이 경매처분됨
1660년(54세): 유태인 빈민촌 로젠그라흐트으로 이주
1663년(57세): 헨드릭게 사망
1668년(62세): 티투스가 막달리나 반 루와 결혼하였으나 반년 뒤 사망
1669년(63세): 며느리의 집에서 손녀와 함께 거주. 이해 10월 4일 렘브란트 사망
유화, 소묘, 에칭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17세기 화가.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능숙한 명암의 배분이 특징.
조용하지만 깊은 감정 상태에 빠진 영원한 인간세계를 독특하고 생생하게 재현.
평생 유화 160점, 에칭 80점, 드로잉 600점 등 무려 850여 점의 성경그림제작.
데뷔작 스데반의 순교(1625년)~최후작 탕자의 귀향(1669년).
1766년부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박물관에 전시.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러시아 폭격을 피해 4년 동안(1941~1945) 우랄 산맥을 넘어 소금 광산에 비밀리에 옮겨져 보관.
헨리 나우웬
* 생애
1932년 네덜란드의 해안지대인 네이케르크(Nijkerk)에서 세무직 공직자의 첫째아들로 태어남.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받음.
예일대학교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전공
1971년이후 예일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수로 재직
페루의 빈민가에서 사회선교 실천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의
캐나다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박약장애인들을 위해서 봉사함.
1996년 심장마비로 별세
* 저술한 책
《예수, 우리의 복음》/복있는 사람
《영성에의 길》/IVP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IVP
《춤추시는 하나님》/두란노
《노인의 영광은 백발》/한국기독교연구소
《마음에서 마음으로》/가톨릭출판사
《상처입은 치유자》/분도출판사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분도출판사
《제네시 일기》/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