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근대전환기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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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전환기 철학
Ⅰ 서론
개항기(19세기 중후반) 이전까지의 조선사회는 봉건적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나타났던 근대 지향적 개혁 운동(18세기의 사회 변화들)이 기득권층의 반동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간 후 조선사회 내부에서 발아하고 있던 근대 지향적 움직임들은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부의 상황은 동아시아를 향해 오는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곧 개항기에 서구 열강과 일본, 중국의 침략은 조선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군사적·경제적 침략이었기에 조선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기존의 봉건적 질서)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게 됐다.
이렇듯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의 반(半)강제적 이행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사회 내부에서는 여러 사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상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척사위정 운동. 둘째, 개화사상. 마지막으로 민중운동 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본론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사상을 차례로 살피고, 각각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척사위정 사상
척사위정의 사상의 역사적·사상적 연원은 멀리 병자호란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곧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한 소중화론의 제기라든가,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에 대한 수차례의 탄압 등은 척사위정론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홍원식, 「척사위정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p219.
개항기 척사위정 운동의 전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곧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쳐 개항 이전까지에 해당하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기와, 정권이 고종으로 넘어가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는 1876년을 전후한 시기, 그리고 1880년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온 후 1881년 고종의 윤음이 내려지기까지의 시기이다. 홍원식, 「척사위정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p220.
먼저 쇄국 정책 시기의 척사위정 사상으로는 이항로와 기정진의 상소를 들 수 있다. 이항로는 서양을, 부모와 자식간이나 임금과 신하간의 윤리라든가 태극과 같은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는 없이 재화와 여색만을 중시하는 오랑캐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병자호란 이후 기호 노론들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지켜온 화이(華夷) 사상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책과 같은 곳.
척사위정론은 다시 1876년 일본과의 개국 통상을 전후해 전개되었다.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고종은 민씨 척족 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의 통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기호 노론 안에서도 화서(華西)학파가 중심이 되어 다시금 척사위정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는 첫 번째 시기와 달리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볼수 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척사위정론의 제기는 김평묵(金平默), 홍재구(洪在龜),가 중심이 되어 지은 연명 유소와 최익현(崔益鉉)의 이른바 ‘오불가소(五不可疏)’인「지부복궐척화의소(지부복궐척화의소)」를 들 수 있다. 상소의 주된 내용은 화이관을 바탕으로 서양을 금수시한다거나 서양의 상품을 사치품으로 본 것 등 이전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척사위정론은 일본과의 개국 통상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니만큼 척사의 주된 대상도 자연스레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일본이 교린(交隣)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전의 일본이 아니라 서양과 똑같다는 ‘왜양일체론’을 내놓게 되었다. 홍원식, 「척사위정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p221
1880년 겨울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준헌의『조선책략』을 일본에서 가져오면서 다시금 척사위정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때는 영남 유생 1만3천여명과 관동 유생 1만여 명 및 기타 경기, 호서, 호남 지방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역적으로 광범위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당파를 넘어선 범재야 유생들의 운동이란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당파를 넘어선 범재야 유생들의 운동이란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영남 남인과 김평묵을 중심으로 한 일부 기호 노론이 연대한 점은 당파와 학통으로 깊이 멍들어 있던 조선 후기의 정치사를 생각해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위의 책과 같은 곳.
이렇듯 척사위정 운동은 반침략, 반외세의 특성이 두드러진 재야 유생들의 상소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홍원식, 「척사위정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p222
Ⅲ 개화파의 사상
변법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옥균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철학적 태도를 견지한 사상가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내 생각으로는 실사구시만한 것이 없으니, 곧 한두 가지 긴요한 것들을 급히 시행해야 하지, 원대한 책략을 편다고 하여 한갓 헛말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또『치도략론(治道略論)』에서는 “오늘날 우선 힘쓸 것은 실사구시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사고에 입각하여 현실 문제를 구체적으로 탐구한 결과, 그는 위생, 농업, 양잠, 도로 등에 관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그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도 부정하는 철저한 무신론을 표방하였다. 나중에 그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도 부정하는 철저한 무신론을 표방하였다. 나중에 그는 서양 기독교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기독교가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서 현실적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종란, 「개화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p230
참고문헌

홍원식, 「척사위정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이종란, 「개화 사상」,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이철승, 「민중 사상과 종교」, 『강좌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이철승, 「동학사상에 나타난 자아관의 성립 근거와 의의」, 철학연구 87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