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1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1
 2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2
 3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3
 4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4
 5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5
 6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6
 7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사상 동향
1. 한국, 개화파의 사상
1) 실학사상의 계승
조선후기 사회는 내정의 부패로 인한 민생의 파탄과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이라는 이중적인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사로 그 해결책을 달리하였다. 위정척사파가 예의문물과 덕치로 표현되는 기존의 典章制度를 회복하고 農本的 兵農一致를 실현함으로써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개회파는 궁극적으로 서구 시민사회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함으로써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대외적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위정척사파는 제국주의 열강을 불의의 침략세력(禽獸)로 규정하고 저항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제국주의 열강이 중화적 질서체계로 편입해 올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 개화파는 제국주의 열강을 선진문명국으로 규정하고, 通商開國을 통하여 國富를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통상개국이란 조선이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됨을 의미한다.
개화파들이 이러한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을 순전히 외래적인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이미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에 의해 민권사상 등 자유평등론의 맹아와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 그리고 통상개국론 등이 제기된 바 있었다. 개화파들이 서구적인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자 하였을 때, 실학사상이 바로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2) 個體重視의 논리
개체중시의 논리란 보편적 전체보다는 특수한 개체를 중시하는 것을 말한다. 개화파에게 있어서는 사고의 초점이 개체에 있고 전체에 있지 않다. 위정척사파에 있어서는 내 민족보다는 범인류를 지향하고, 나보다는 국가적 전체를 지향하는 것이 ‘君子’의 공정한 心法이었다. 그러나 개화파들은 범인류보다는 내 민족을 지향하고, 전체적 질서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위정척사파는 항상 전체가 하나의 보편적 질서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질서의 중심을 이루는 것을 ‘宗’이라고 하였고, 그 宗에 입각하는 것을 ‘正統’이라 하였다. 그러나 개체주의적 입장에 선다면 宗이라는 것도 없어지고 정통이라는 것도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定이고 모두가 正統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연결된다. 따라서 전체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개별적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경험주의적 방법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는 역사인식에 명확히 드러난다. 성호 이익은 우리나라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만 배우고 우리의 역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적 역사를 새롭게 서술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바, 독립적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과제라 하겠다. 이익이 “동국은 스스로 동국이다(東國自東國)”라고 하였듯이, 그에게 있어서 민족적 자기동일성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게 제기됨을 볼 수 있다. 실학자들은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疆土言語風俗 등 다양한 방면에 주체적인 관심을 기울여서 민족정체성의 재확인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실학파드르이 이러한 민족주의적 定向은 당시 새롭게 제기된 자연과학적 성과에 의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즉 전통적인 中華의 관념이 天圓地方說에 입각한 것이라면, 이익이나 홍대용정약용 등은 地圓說地動說 등을 주장하여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붕괴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홍대용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중국사람은 중국으로써 정계를 삼고 서양으로써 倒界를 삼는다. 반면에 서양 사람은 서양으로써 정계를 삼고 중국으로써 도계를 삼는다. 사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데에, 계를 따름이 모두 그러하며, 橫界도 없고 到界도 없으며 모두 균등하게 正界인 것이다.
홍대용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지역의 상대적 자기중심성을 확인하고, 이에 입각하여 모든 국가나 민족의 자기중심성을 주장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세계의 유일한 中心이라든가 절대적 宗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均等하게 正界이다”라고 하였듯이, 이제 모두가 상대적으로 中心인 것이며, 모두가 상대적으로 正統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상대적 자기중심성에 대한 인식은, 모두 마찬가지의 사람이며 君王이며 國家이며 風俗이라는 平等의 관념을 산출하였고, 마침내 ‘華夷一也’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보편주의에 입각한 대일통적 세계관이 계서적 특성을 지닌다면, 개체주의에 입각한 실학파나 개화파의 세계관은 평등의 이념을 지향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개화파들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自主獨立’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韓中間의 事大字小의 관계를 支配와 屈從으로 이해하고,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하여야 한다는 것은 第一義로 삼았다.
개화사상의 개체주의가 민족적 차원에서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하게 하였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자유평등론을 주창하게 되었다. 자유평등과 같은 개인적 권리에 대한 자각도 역시 실학파의 四民平等論과 民權思想으로부터 그 맹아를 찾을 수 있다. 개화파에 있어서 四民의 평등과 민권을 주장할 뿐 아니라, 민권은 개인의 권리로 더욱 구체화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각은 이제 국가와 개인의 전통적인 위상을 전도시키기에 이른다. 과거에는 다분히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君王과 宗廟社稷에 충성을 바쳐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統治者는 國民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라는 인시과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는 인식이 보다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3) 功利主義와 狀況의 논리
功利主義는 功利를 최고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에 입각해 실천적 방향을 설정하며, 그에 입각해 행위의 선악을 판단한다. 위정척사파에게 있어 功利란 단지 義理의 부산물이었다. 그들은 의리를 추구하면 공리가 수반되지만, 의리를 외면하고 공리만을 추구한다면 의리는 소멸하고 공리도 작아진다고 보았다. 위정척사파의 義理論은 궁극적으로는 利害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은 다만 그서이 옳은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生死를 돌보지 않고 能力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擧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는 華夷의 義理를 공허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利益이 된다면 화이을 불문하고 수용해야 된다고 주창하였다. 正德에 앞서 利用厚生을 강조했던 실학파에서도, 이용후생을 위해 財利의 생산을 필연적이요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그 효과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개화파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연해졌다. 개화파 유길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허명을 버리고 효실을 추구하여 안락과 편리를 달성하는 것이며, 이것이 학문적 진실의 척도였다. 반면에 옛 선현의 글을 읽는 것은 고인의 찌꺼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공부라 할 수 없고 도리어 해를 끼칠 뿐이라고 인식하였다. 서재필도 “사서삼경을 읽어 가지고는 이 세계에는 무용지인이 될 터이지 무슨 학업이든지 실상학문을 배워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을 한 가지 능히 하게 되어야 그 사람이 남에게 대접도 받고 무엇을 하여 먹고 살던지 살 방책이 생길지라” 《독립신문》1896년 12월 22일자 논설
라고 주장한다. 곽기락은 利害에 밝고 時勢를 헤아려 臨機應變하는 것이 明王之道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개화파의 입론이 功利主義와 狀況論理로 명확히 요약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