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사상

 1  지눌사상 -1
 2  지눌사상 -2
 3  지눌사상 -3
 4  지눌사상 -4
 5  지눌사상 -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지눌사상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눌사상
1.지눌의 생애
조계종 개조. 속성 정. 호 목우자. 시호 불일보조. 서흥 출생.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 1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大覺)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1185년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교(禪敎)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한편,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曹溪山),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2.시대적 배경
고려가 건국한 후 불교가 진흥되는 과정에서 승려의 타락상을 엿볼 수 있다. 정종의 맹목적 신앙은 불교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으며, 사람들은 다투어 승려가 되어 국사, 왕사로 출세하려고 들었으며 승려들은 높은 벼슬아치나 지방 호족 같은 귀족신분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가난한 자들과 떠돌이들은 승려가 되어 밥을 얻어 먹거나 몸을 절에 의탁하였다. 또, 요역(搖役)을 피하고자 출가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부모에게 불효한 자와 상전을 배반한 종들이 승려가 되어 관가의 눈을 속이기도 하였다. 사찰에서는 이들을 포용하였으나 지배자의 처지에서 보면 이것이 모두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빌미가 되었다.
절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거느렸으며 승려들은 호사스런 생활을 누렸으며, 각종 불사도 극도로 사치스럽게 벌였다. 또한, 부유한 절에서는 베나 곡식 따위를 가지고 장리놀이를 하였다. 승려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권선(勸善)하여 절 짓는 일을 강요하였고 절을 지을 때는 관아에 공사를 맡기는 경우도 잦았다. 한편 기복불교가 만연하여 사람들은 너도나도 재앙과 고통을 물리치고 복을 달라고 빌었다.
왕실과 사찰은 신라 말기보다도 더욱 절도를 잃고 있었다. 그리하여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참회하는 법회를 열어 씻어내고 나쁜 짓을 하고도 작은 선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부처에게 빌기만 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살고 복을 받는다는 의타적 의식이 왕실과 민중을 가릴 것 없이 온 나라에 팽배하였다.
10세기에 국내 장시가 발달하고 무역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승려들도 여기에 뛰어드는 풍조가 일었다. 관아를 제외하고는 사찰이 가장 큰 구매집단이었다. 10세기 무렵 전국 승려의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사찰에서는 직영상점을 본받아 상점 경영에 뛰어들었다. 승려들은 팔관회에 참여하여 외국 상인과 교역하기도 하고 경전 인쇄나 단청에 필요한 염료 따위를 구입하려고 직접 외국무역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또한, 사찰과 승려들은 원(院)같은 숙박시설도 운영하였다.
사찰의 왕성한 상업활동은 고려 사회에 특수하게 드러난 현상이라 하겠으나 이를 통해 불교 승려의 타락과 변질 양상을 잘 보여준다.
한편 11세기에 들어 문벌 귀족이 형성되면서 불교는 다시 한번 이들에게 농락 당하였다. 곧 문벌 귀족은 특정 종파를 대변하였다. 문벌 귀족들은 여기저기 원당을 세워 재산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삼거나 절의 경제를 장악하여 사유화하였다. 또, 자신들의 아들을 출가시켜 교단의 주도권을 움켜쥐었다. 당시 가장 큰 종파였던 화엄종과 법상종은 문벌귀족과 결탁하여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다른 교단을 무리하게 장악하려 하면서 부패를 부추겼다. 법상종은 화엄종의 무차별에 반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성불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여 귀족의 정서를 대변하였으며 뒷날 인주 이씨와 같은 문벌 귀족의 중심 교단이 되었다.
3.지눌의 사상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