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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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평전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교회사
김교신 평전
1장 기독교의 교훈은 좋으나
김교신은 부유한 가문에서 성장했다. 가족관계를 보면, 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을 숙부가 대신 해줬다. 그의 모습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숙부와 어머니는 김교신을 많이 의지한 것 같다. 김교신을 열두 살 때에 한매와 결혼을 했고, 이들 사이에서 2남 6녀가 태어났다. 김교신은 어릴 적부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회고록에서, 15세 즈음 기독교의 교훈은 좋으나 기도하는 것은 미신 같아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교신은 학창시절 기독교를 하나의 도덕이나 윤리적 가르침으로는 가치가 있다고 여겼지만, 기도와 기적은 미신 혹은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교적 윤리에 충실했고 자연과학을 신뢰했다. 이랬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을까. 그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3.1운동에 연루되었고 그 여파가 가문에 번지자, 복합적 이유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2장 일본 유학과 입신의 여정
인생에서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김교신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영어학교의 스승 히사부로에게는 시관 관념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 입한 한 후 영어과에서 박물과로 전과를 한다. 그는 자연에서 직접 가르침을 얻고자 했는데, 과학을 신뢰하는 이성적인 지식인의 면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박물과에서 또 다른 스승을 만나는데 풍자를 잘하는 오카아사 지로에게 풍자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김교신이 후에 풍자의 대가라고 불렸던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김교신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준 스승이 있었는데, 일본이 낳은 세계적 신학자로 평가받는 우치무라 간조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는 하나님을 만난다. 무엇보다 우치무라의 사상인 일본적 기독교와 무교회주의에도 영향을 받는데, 김교신인 무교회주의와 조선적 기독교를 강조하게 된 원인이다. 김교신은 기독교를 접하면서 그의 가치관은 그게 변한다. 유교적 이상과 인간관에서 극복되어 오직 성서적 진리만을 추구하게 된다.
3장 조선을 성서 위에 세워야
김교신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원했는데, 무엇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가르침을 받아드렸다. 당시 조선에게 일본은 원수이며 매우 민감한 대상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모습은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김교신이 만났던 일본인들의 도덕성과 신실함은 배워야할 점이었다. 김교신은 일본인에게 멸시받았던 조선인 콤플렉스를 극복 하였는데, 그는 조선을 하나님 말씀으로 다시 세우리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그는 무교회주의자의 소명인 각자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실천하며, 평생을 평교사로 살았다. 그와 뜻이 맞는 주변 사람들은 조선을 성서화 하기 위해 ‘성서조선’의 발행한다. 하지만 1930년 이후 ‘성서조선’을 김교신이 단독으로 책임지고 발행하게 된다. 김교신이 이 큰 짐을 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조선을 성서위에 다시 세워 조선을 갱신하자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아 김교신은 ‘무교회주의자’였지만, 그의 의도는 성서적 진리와 가르침을 따르고 그 복음을 전하는데 있었다.
4장 공덕리의 특이한 집
김교신은 당시 서대문 밖인 외곽 지역인 공덕리에 거주 하였다. 그는 당시 누룩장수들이 사는 곳으로 무시 받던 이 지역에서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기 원했고 실천했다. 그의 집은 개인적인 공간이기 보다 성서조선사이고 무교회지인 들 간의 회합의 장이었다. 또한 그는 제자들을 하숙 시키며 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양육하였다. 김교신의 자녀 양육은 어떠했을까. 김교신은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는데 그는 자녀들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움 아버지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녀에게는 아주 호되게 꾸짖었다. 김교신에게 자녀 양육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하나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픈 부모의 가슴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교신의 집이 공덕리의 특이한 집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음력이 아닌 과학적인 양력을 보냈으며, 음력설 또한 폐지했다. 제사 대신 예배를 드렸지만, 그는 두루마기를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며 어머니께 효를 행했다. 그의 집은 기독교와 유교의 분위기가 적절히 조화됬다.
5장 양칼 같은 지리 선생
그는 양정고등학교에 부임해서 교사로 일했다. 그는 교사로 일하면서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는 것은 물론 성서를 연구하고 성서조선의 원고를 집필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강조했고, 매 주일 학생들에게 성서를 가르쳤다. 김교신은 술과 담배 문제에 엄격했는데, 자신이 주최하는 연회에서 사직서 품고서 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김교신에게 이 사건은 교사로 부임하자마자 닥친 시험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술을 먹지 않아도 되는 예외적인 사람이 되었다. 김교신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지리수업을 인물과 역사 위주로 가르쳤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신민통치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학생들에게 ‘조선에 대한 재인식’을 심어주기 원했다. 그는 쉬는 날 ‘물에 산에’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직접 자연으로 나가 살아있는 조선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학생들이 도덕성과 진실성 정직함을 비롯하여 민족애를 간직하기를 원했으며, 그의 교육은 인성교육이었다.
6장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 생生의 기독교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 해명을 하자면, 그는 교회 공간만을 예배장소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 하고 예배하는 모든 공간과 시간으로 확대했다. 즉 교회의 개념이 당시 조선교계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당시 조선교회는 교회를 노아의 방주의 개념처럼 이해했다. 하지만 김교신은 교회가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을 비판했으며, 교회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통로임을 주장했다. 김교신의 교회론에 영향을 미친 사람을 바로 그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다. 그 역시 교회가 구원받기위해 필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무교회주의자들은 단순히 교회를 거부한 것이 라기 보다, 예배당과 교회를 구분하기 원했고, 교회 조직과 위계적인 성직자 제도, 구원의 매개인 교회 등과 같이 비 진리 비성서 적인 행위들을 거부하고 극복하기 원했다. 또한 김교신은 ‘생의 기독교’를 강조하였는데, 바로 삶이 기독교를 말한다. 그는 예배가 의식이 아니라 삶 자체가 예배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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