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 생명윤리철학 기사 읽고 비판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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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철학 기사 읽고 비판적 사고
‘서울에서는 이틀에 한 명꼴로 아기가 버려 진다’
서울에서는 이틀에 한 명꼴로 아기가 버려진다는 기사를 접하였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서울시는 지난해 8월 ‘입양 특례법’ 개정 이후 영유아 유기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내에서 버려진 아기는 베이비 박스를 보유하고 있는 서울시 관악구의 ‘주사랑 교회’에서 모두 발견되었으며 지방에서 까지 올라와 아기를 버리고 간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 내에서의 영유아 유기율은 증가하고 지방에서의 영유아 유기율은 감소하였다고 한다.) 버려진 유아들의 미혼모의 사연이 담긴 쪽지에는 바뀐 입양 특례법 때문에 아이를 입양 시킬 수 없어서 아이를 버리고 간다고 한다.
도대체 바뀐 입양 특례법이 어떠한 것 인데 미혼모들에게 한 생명을 버리게끔 하는 것인가?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바뀐 입양 특례법 에서는 아동의 인권을 대폭 강화하여 친부모 출생신고를 하여야 입양절차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개정안이다. 미혼모들은 대부분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아이를 정상적으로 키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어느 여자이건 아이를 여자인 자신홀로 키우고 싶어서 자의에 의해 미혼모가 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미혼모들에게 친부모 출생신고를 하여야 아이를 입양 할 수 있다니 세상에 어느 미혼모가 선뜻 친부모 등록을 결심할 수 있을까? 게다가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아이를 함께 만든 남자와는 연락이 두절된 체 혼자만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하면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의 인권과 존엄성은 남겨진 여성(미혼모) 만이 책임 져야 할 문제인 것인가? 새로이 개정된 법안은 그러한 점은 명시하지 않은 상태로 홀로 남겨진 미혼모에게 무조건 적인 부모로서의 책임만 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미혼모의 행동이 올바르다는 것도 아니고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의 인권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혼모의 등장이 의도적인 것이 아닌 이미 일어난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이미 이 시대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미혼모들의 인권은 보호해 주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프랑스는 미혼모들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게다가 미혼모를 낳아도 아이의 출생 시부터 의무적인 공교육 차원까지 지원해주는 시스템으로 미혼모를 법적인 체계 안에서 보호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 미혼모 본인의 경제적인 자립의 틀까지 복지적인 차원에서 마련해주고 있다. 그 덕에 프랑스의 미혼모들은 미혼모가 된다 하더라도 쉽사리 아이를 버릴 생각부터 하지 않고 자신도 자립하며 아이를 키워나갈 의지를 다진다.
이에 우리나라도 이제 미혼모를 냉소적인 시선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법적인 제도망 안에서 미혼모의 인권 또한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미혼모의 선택이 영유아의 존엄성과 인권을 좌우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미혼모의 인권을 우선적으로 법적 제도망 안에서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사회에서부터 미혼모 또는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하여 주홍글씨나 조선시대의 서자처럼 낙인을 찍는 것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서울시 관악구 주사랑교회는 미혼모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지금 안은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입니다’ 라는 글귀를 베이비 박스 앞에 써놓았다고 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감정적인 호소만으로는 미혼모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미혼모들에게 감정적인 어구로 호소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또한 미혼모들의 정신적인 건강부분과 미래에 우리나라를 이끌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미혼모의 아기들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구조적인 제도망이 필요한 실정이다. 자신의 아이를 낙태라는 방법으로 죽이기 이전에 근원적인 모성으로 낳기를 선택한 미혼모에게 자신의 아이를 키워 나갈 수 있는 법적인 제도망 까지 마련해준다면 저조한 출산율로 미래의 인적 자원 난을 걱정하는 국가적 고민 또한 해결될 것이며 사회의 소수자들도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조금 더 폭넓은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숫자만 좋아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오늘 장밋빛 벽돌이 아름다운 집을 보았어요’ 와 ‘오늘 길을 걷다가 십만 프랑 짜리 집을 보았어요‘ 에서 후자의 경우에 더욱더 공감적인 반응을 한다. 이 이야기는 생텍쥐 베리의 ‘어린 왕자’ 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로 어렸을 때 종종 들어 본적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 기사의 내용이 물질 만능 주의에 팽배한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데 그치는 기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런데 내가 생각 했던 맥락과는 조금 다른 내용 이였다. 물질만능주의를 토대로 하여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대학 평가에 의거한 대학교내 비생산적인( 과연 누구에 의해 정의된 기준인지 알 수 없지만) 학과의 구조조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붓 대신 피켓을 들고선 회화과 여대생 그녀는 주장한다. 취업이 과연 전부인가? ‘고흐가 취업했냐? 피카소가 취업했냐?’ 이에 대한 학교 측의 답변은 ‘우리 학교 회화과에 고흐, 피카소 같은 작가가 나오긴 하였느냐?’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답변이다. 대한민국은 과연 교육철학의 최종산물이 취업인 것인가? 학생들은 그저 꿈은 중요하지 않은 오로지 학교의 경쟁력과 취업률을 위하여 공장에서 나오는 하나의 상품에 그치는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한 학교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바로 교육부에서 정해놓은 대학평가 기준항목 8개중 4개 항목이 즉 50% 이상이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율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정부의 지원이 끊기는 것이 대학교의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초과학이나, 기초예술, 인문과학 등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개인의 자아의 성장을 도모하고 모든 원리 및 학문의 토대가 되는 것을 순수하게 연구하는 순수학문의 경우도 과연 타과와 동일하게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율로 판가름이 나야 하는 것인가? 이는 옳지 않다.
우리가 현존하는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고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결과물은 인간의 끊임없는 사유와 창의성 덕분에 발전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네발달린 짐승들 혹은 더 나아가 기계들과 견주었을 때 인간이 가진 유일한 고등함의 차이가 아닌가? 그런데 그러한 것들의 토대가 되는 순수학문들을 순수학문의 결과물인 산업화 속의 취업률로 배척하려 하다니 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과연 스티브잡스가 인문학에 관심이 없었으면 애플사와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었을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도 경제학이 아닌 이미 연구가 대다수 포화상태에 접어든 학문인 심리학을 전공했었던 인물이다. 앞으로는 휴머니즘 없이 테크놀로지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사회가 올 것이다. 한사람의 창의력이 앞으로는 엄청난 수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일례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외국의 대학교로 유학을 가거나 외국의 기업에 입사 할 때 에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 표절과 창의력의 부재라고 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생산이나 취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끊임없는 사유의 결과 끝에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킬만한 생산성 있는 창의성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니까. 이에 우리나라도 앞으로 세계적인 시대에 따른 경쟁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6.25 전쟁이후 ‘한강의 기적’을 빚어낸 무조건 열심히 부지런한 수동성 등과 같은 가치관에서 조금 탈피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충분히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는 조금 더 선진국다운 교육상을 연구하고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순수학문에 대한 지표는 수치로 도식화 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대학교가 기업같이 바뀌고 있는 현시대에서 케인즈가 주장했던 것처럼 단순히 눈앞의 이익만 보는, 시장의 흐름에 이런 현상을 맡길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나라와 더 나아가 우리 글로벌 시대를 창의성 하나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많은 순수학문을 공부하고 있는 열정적인 학도들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산업적구조로 물질만능 주의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가치는 있는 법이다.
렛미인 쓰레기 더미에 갇혀 살던 딸, 배은정 완벽변신 깜짝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핫한 이슈가 되고 있는 성형미인. 미, 외모지상주의, 그리고 권력. 우리사회에서는 미가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크게 모순되지 않는 어구로 통용되는 것 같다. 렛미인에 선발된 배은정 씨는 렛미인에 당첨되어서 마치 ‘황금 동앗줄이 내려온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과연 배은정씨가 잡은 동앗줄은 황금 동앗줄 이였을지 썩은 동앗줄 이였을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았을 것인지 의문이다.
일례로 들어 일확천금의 평생을 노동으로 일해도 벌지 못할 돈이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미래를 보아도 그렇다.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복권에 당첨되어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가? 아니다. 그들 중 대다수가 본질을 망각 한 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삶이 피폐해져 이전의 삶보다 못한 삶을 살거나 급기야 죽음을 택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매체에서 접하고 있다. 한순간의 외모 변화 또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하나의 권력으로도 통하고 있는 흔히들 말하는 완벽한 미(인형 같은 몸매, 외모, 지방흡입을 통한 완벽한 바디)를 거의 하루아침에 얻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또한 그것에 대한 부작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은정씨는 매우 가난한 형편이고 쓰레기 더미에 묻혀 살고 있으며 그녀가 같이 살고 있는 아버지 또한 뇌 병변 장애로 가정을 폭력 속으로 치닫게 한 사람이자 그녀를 가장 불행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그녀의 외모가 바뀌는 것을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생각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이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 때문이다.
렛미인 프로그램에서는 그녀의 외모가 변하는데 5322만원이 들었고 그녀의 외모의 뒤바뀜으로 인해 그녀의 모든 주변상황이 잘 해결되어질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 백팔십도 바뀐 것처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