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적인 사고 기독교에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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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용주의적인 사고 기독교에 필요한가?
1. 문제제기
실용주의란 의미나 가치가 실용적인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의다. 이것은 공리주의와 매우 흡사하다. 공리주의는 유용성이 곧 선악의 기준이라는 사상이다. 실용주의자나 공리주의자는 어떤 행위의 기능이나 과정이 바라던 대로의 효과를 내면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악하다고 믿는다.
오늘날 교회들이 앞 다투어 따르는 현대적인 세상 정신이 있다면 바로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는 성공과 만족이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인간의 본성적 경향성에 부합하는 우리에게 매우 친밀한 사상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의 적극적 옹호 아래 교회에 수용될 수 있었고, 아무 저항 없이 교회 안에 횡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교회 안에서 성실하게 진리 왜곡을 수행한 틀림없는 세상 정신이다.
이렇게 실용주의 정신은 신앙적인 수단을 사용해 번영을 얻을 수 있다는 번성 신학으로 나아갔다. 번성 신학은 ‘좋은 결과를 믿는 것’과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실용주의가 교회에 깊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를 믿는 이유도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느냐 안 돕느냐에 찾는다. 하나님의 존재를 실효성에 따라 파악하려는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는 비결로 말하지 않다. 성경은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번성하는 것을 신자의 보편적인 삶이나 목표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용주의를 수용한 오늘날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예수 믿으면 잘되고 번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생긴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라는 객관적인 진리를 믿으며 그 진리를 기반으로 한 구원과 승리를 말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사고는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일반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사고를 문화적 측면으로 보았을 때, 기독교는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하는 사역 즉 불신자의 영혼을 구원하게 이르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불신자는 열매를 보여 달라고 한다. 열매 없이는 믿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실용주의적인 것을 수용해야 할 것인가? 배척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필자는 ‘실용주의적 사고가 기독교에 필요한가?’를 고민해 보았다.
2.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은 현재 세계의 삶에 영향을 주고 삶을 지배하는 사상, 지배하는 철학이 되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로는 퍼스(Peirce, charles Sanders), 제임스(James, willianm), 듀이(Deway John)가 중심인물이다. 특히 필자는 제임스 사상에 관하여 중점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제임스가 주장하는 프래크머틱한 태도는 원리·범주·필연성보다도 결과·성과·사실 등에 치중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진리도 선험적 보편타당성을 띤 것이 아니라 증명이 되어야 하며, 이론의 실천이나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는 것이어야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개념속에 있는 진리라는 것은 관념의 작용력을 의미하는 이다. 이미 경험속에 쌓여있는 신념에 동화시키려고 하는 개인적 소망을 만족시키는 힘이 곧 진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란 어떤 사전을 찾아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관념의 어떤 성질이다. 진리랑 실재와 관념간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고 허위란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있고 알 수가 있다는 신념에 두 가지가 있다. 경험론적인 입장과 절대주의적 입장이다 .독단론자들은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있다는 데 반해 경험론자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언제일지는 확실히 알 수 가 없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안다는 것과 우리가 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해도 알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진리란 ‘좋은 것의 일종’이요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좋다는 카테고리와 전연 별개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과 동일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참되다는 말은 좋은 신념, 어떤 이유에서건 좋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신념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제임스에 의하면 “진리에 관한 프래그머티스트의 관념은 바로 그와 같이 도전이다.” 믿어서 우리에게 좋은 신념은 참이다. 진리에 관해 프래그머티즘이 내세우는 근거는 그것이 우리 삶을 가장 잘 인도해 주느냐 않느냐 하는 점, 즉 삶의 여러 부분에 적합하느냐 또 우리 경험의 여러 가지 요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총체적으로 잘 결합시켜 주느냐 하는 점이다. 신학적 관념, 특히 신이란 관념에 그런 기능이 있다면 프래그머티즘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프래그머틱한 입장에서 보아 그처럼 성공적인 관념을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으로선 넌센스라고밖에 보지 않는다. 구체적 실재와의 이런 일치 이외에는 다른 아무 진리도 없다고 프래그머티즘에선 보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신비주의에 있고 신비주의의 핵심은 엑스타시스라고 불리우는 이상체험에 있다. 종교적 전기에서 두드러지는 인물들은 금식 기도하는 가운데 엑스타시스를 체험하는 수가 많다. 종교사상의 영걸들은 거의가 금식기도 하는 가운데 엑스타시스를 체험하고 천계를 얻었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무당의 경우는 소위 무병이라는 병을 앓다가 신이 내려서 무당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제임스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다만 갑작스런 현전 같은 이상체험을 하게 되는 경우와 도 자기가 아산화질소라는 마취제를 복용한 경우를 취급하고 있는데 이상의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비정상적이요 병리학적현상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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