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와 영성 - 오리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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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선교사와 영성
《오리겐(c.185-254/5)》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대표로 오리겐(Origen)을 볼 때, 그의 안에는 ‘예수의 제자’가 플라톤적인 사변 철학자와 위태위태하게 공존한다고 하는데, 클레멘트의 발전이 믿음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진행하는 것이라면, 오리겐에게 있어서는 지식과 사랑이 나란히 손잡고 진행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의 가르침들과 그 해석에 관해서 묻고 교사의 도움 없이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입맞춤을 받고 있음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in Cant. I. 333. 1)
‘우리의 신랑인 하나님의 말씀’ - 여기에 오리겐이 생각하는 것의 핵심이 있다. 오리겐은 어떤 종교적 전통에서도 진화된 적이 없는 동경을,’지적인‘ 엑스터시에 대한 것이 아니요, 신비로운 흡수에 대한 것도 아니라, 자기의 피조물들과 허물없는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달콤함을 몸으로 직접 확인하고 체험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고 있다. 오리겐에게 있어 진리의 발견과 난제의 해결, 의미의 파악은 개인 대 개인의 직접적이고 관계적인 문제이다. 정신과 마음(Heart)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랑과 이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단지 간접적으로만 아는 것으로는 영혼의 갈구와 사랑에 충분하고 완전한 만족을 줄 수가 없다.
오리겐은 주의 고난을 자기의 고난으로 알고 주를 모방하며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환상을 놓치는 일이 없다. 레위기에 관한 한 설교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목적으로 하는 금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이러한 금식은 진실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형제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분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육신한 주의 모방으로 제시하기에 힘쓰는데, 그것은 주께서 주의 성육신을 고통을 겪는 인류와 동일시하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주시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긍휼(Kenotic compassion)을 본받는 방향으로의 성장이며, “교회의 ‘목’에 걸린 목걸이 장식은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또한 교회의 겸손이 그리스도의 겸손의 분량까지 자랄 때 교회는 최상의 장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리겐은 『순교의 권유』(Exhortation to Martyrdom)에서 이그나티우스를 본받아 순교자의 죽음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십자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며 순교는 극기의 진실성에 대한 최종 시험이다. 이러한 순교를 기꺼이 하는 것은 욕과 굴욕이 신자가 받는 몫일 때, 완전히 임재하게 되는 ‘성령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 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생명 안으로 ‘넘쳐흐르지’ 않으면, 그의 기쁨과 위로도 우리 안으로 ‘넘쳐흐르지’ 않을 것이다.
오리겐은 성육신 모델의 구심성에 있어서 클레멘트보다 훨씬 민감하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일반 철학의 관점에서 내린 영계(靈界)의 평가와 그에 따라 구원을 물질계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는 구원관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누스(영, 영혼, 주체, 지성)는 하나님과 ‘동족’이며 따라서 본성에 의해 하나님 쪽으로 향한다는 것은 오리겐으로서는 자명한 일이다. 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몸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며 누스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떤 종류의 감각 체험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하나님은 어떤 것(a thing)이 아니고,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언제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신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 상대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의 눈부신 광휘를 견딜 수 없는 자들”로부터 자기를 감추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재 겪는 경험에서 우리는 ‘그림자’ (shadow) 속에 있는 셈이다. 아가서 2:3 아 2:3 -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의 ‘그늘’ (shade)에 대한 주석에서 오리겐은 현재 교회가 처해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대한 복잡한 해석을 전개한다. 먼저 율법이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히 10:1) 히 10:1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었으므로, 그리스도는 훨씬 더 위대한 것들의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영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생명 안에서 이해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림자 안에서 삶으로써 되는 것이며, 오직 거기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우리는 장차 오는 시대에 대면하여 보는 환상이 있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현재 우리의 눈앞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자 속에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림자를 던지므로 그는 아직 우리 앞에 완전히 나타나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이다.(골 3:3-4 참조.) 골 3:3-4 -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런데 그런 그가 참 모습으로 나타날 때, 즉 우리가 그를 대면해서 보게 될 때, 우리는 “우주 전체의 하나님, 및 그의 독생자인 아들과” 완전히 연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육신인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최고의 특전이다. 그러나 인류는 육신만도 아니요, 궁극적으로는 육신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육신인 예수로부터의 점진적인 이탈을 포함한다.
상승은 육의 본성과 본성이 아는 방식으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한다. 이 같은 주제는 『아가서 주해』의 머리말에서 ‘정신적’, ‘자연적’, 그리고 ‘관상적’ (inspectiva) 지식이라는 오리겐의 유명한 구분으로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서 관상적 지식이란, 우리가 열등한 방법들을 적절히 구사하면 얻게 되는 초월적 감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영적인 사람에게 성육신 이전의 성육신과 무관한 말씀인 영원한 말씀에 관한 궁극적인 참 지식을 얻기 위한 준비과정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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