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철학과 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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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명가철학과 변자
유가에 경허섭광이라는 말이있습니다. 경허섭광을 터득한 사람은 세계 밖에서 노닌하고 합니다. 결국 외물의 굴레에 벗어나기 위해 도를 알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국 외물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고 도를 깨우치지 못하는데요. 명가 철학의 시초인 혜시 (350~ 260 B.C)는 그 중 한 사람이 었습니다. 『장자』「천지편」에 보면은 ‘혜시는 매우 박학다식한 편이지만 외물에 눈이 멀어 오직 사람을 이기려고만 한다’라고 저술 되있을 만큼 학문적 조예가 깊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혜시 말고도 백마는 말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지며 공손룡이라는 사람이 그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세간에서는 형명지가 혹은 변자로 일컬어 졌습니다. 변자의 저서로는 「공손룡자」일부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합니다. 현재 알려진 혜시나 기타 변자들의 학설은 단지 『장자』「천지편」에 열거되 수십사 뿐입니다. 그러나「천지편」에 열거되 것은 논변에서 얻어진 결론일 뿐이고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 까지의 전제를「천지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명가철학이란?
제자 백가라고 할 때 가(家)는 학파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명가는 학파라는 성격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명가의 대표격인 혜시, 공손룡, 등석, 윤문자, 송경 등은 서로 관련성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계통성이나 조직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남긴 저술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맹자와 장자가 살던 무렵의 사상가들이라는 공통점과 아울러 명(名)과 실(實)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정도가 서로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명가를 명의 대가라는 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명가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은 다양합니다. 송경이나 윤문자는 묵가 집단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장자의 친구인 혜시는 노장 계열로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종합적 학문의 성격을 보이고 있습니다. 명가라는 이름은 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명가는 명칭과 실제, 또는 형식과 내용의 본질과 그 관계성을 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명과 실의 관계를 바로잡아 사회 질서를 회복하려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손룡에게서는 사물의 명칭을 통해 개념의 분석을 꾀한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혜시에게서는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단순한 궤변의 논리는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 학자들은 명가를 궤변론자, 논리학자, 변증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표현도 사실 모두 같은 뜻은 아니지만 명가를 표현하는 적절한 말도 아닙니다. 명가가 궤변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명가 사상가들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들은 논리 자체에 치중한 것도 아니었으며, 변증법적 요소로 다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며, 그 방법으로 명의 문제를 중심에 두었을 뿐이었습니다.
2.명가철학이 왜 나왔는가?
명가가 나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자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한문은 고립어입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조 말에 일본의 이또오 히로부미가 조선의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일본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어떠냐는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총리 대신 한규설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한규설은 불가불가(不可不可) 네 글자로 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가 불가라고 끊으면, 안돼 안돼라는 뜻이 됩니다.
또 불가불 가로 끊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불 가불가로 끊으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어중간한 뜻이 됩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이처럼 같은 말인데도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립어에는 어미 변화가 없고, 고정된 품사도 없습니다. 아울러 조사가 별로 없으며, 문장 부호도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선비들은 10년을 공부해야 한문의 이치를 터득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경험적인 부분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동양 철학이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지적받는 근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원인입니다. 당시는 혼란기였습니다. 혼란시란 옳고 그름의 혼란을 의미합니다. 제후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웃을 침략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말 잘하는 사람(辨士)이나 사정을 잘 살피는 사람(察士)을 우대했습니다. 당시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제나라는 많은 예물을 주면서 학자들을 모아들였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대부로 예우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을 직하라고 불렀는데, 직하는 기원전 357년에서 301년까지 57년간이나 문화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직하에 머물렀던 명가 사상가들이 송경, 유문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명가 이전에 명의 문제를 다룬 사상가들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공자입니다. 공자는 명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그 영향이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고, 나아가 정치, 문화, 형벌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이 입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려면 먼저 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명을 문제삼은 또 다른 사상가로는 노자가 있습니다. 노자는 1장에서 이름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 없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노자가 더 높이는 것은 이름 없음(無名)입니다. 노자의 사상 유명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에 명가 이후에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밖에 묵가 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묵가 집단은 초대 지도자인 묵자가 죽자 세 파로 갈라졌습니다. 이 세 파를 후기 묵가라고 하는데, 그들은 서로 자신이 정통을 이었다고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이 논리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또 묵가와 유가의 다툼에서 나온 영향도 있습니다. 묵가의 유가 비판은 매우 엄격합니다. 묵가는 유가 사상의 중요 부분인 천명, 상례, 예와 악 등을 비판했습니다. 유가 또한 묵가의 비판을 받으면서 그냥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연히 두 사상 사이에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궤변과 논리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3.명가의 대표적 인물
3.1혜시
명가(名家)에 속하는 학자로서 장자(莊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공손룡(公孫龍)보다 약간 앞 시대의 사람이다. 양(梁)의 혜왕(惠王) ·양왕(襄王)을 섬기어 재상이 되었으나 종횡가(縱橫家) 장의(張儀)에게 쫓겨 초(楚)로 갔다가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생애를 마쳤다고 합니다. 박학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는 수레로 다섯이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주장은 《장자》에서 가끔 찾아볼 수 있으며, 명가 중에서 궤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형식과 현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치세(治世)의 이상상(理想像)을 설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자와 친했는데 그 것만을 본다면 혜시는 도가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공부하던 학자였다가 속세의 외물의 눈이 돌아가 결국 어찌할 수 없는 속물이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가 취했던 행동들이 그 때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지금 와서 그의 논변들은 말을 되지 않치만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혜시는 또한 자연과 순응하며 이치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들을 골려주는 것을 좋아했을 지 모릅니다. 혹은 그런것들이 궤변이라는 하나의 말솜씨로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또 혜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자연의 이치를 설파하며 직접적으론 유교와 대립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한마디 마다 유교의 부조리함을 말했습니다. 특히, 그의 말들은 논점이 정확이 설정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혜시의 10사를 보면 그 사실이 명확해 집니다. 10사중 제 7사입니다. 오늘 월나라로 가서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 이 부분을 보면 오늘과 어제라는 말이 비록 일정한 기준은 없을 지라도, 한 논변의 범위 내에서는 오늘과 어제라는 말은 반드시 동일한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그 부분을 장자의 제물론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승인한 논거도 없이 안출한 시비가 바로 ‘ 오늘 월나라로 가서 어제 도착했다’따위이다. 이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한 경우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경우라면, 설사 신통한 우 임금이 계신다고 해도 알 수 없을 텐데,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의 논점의 모호함은 물론 궤론자라는 손가락 질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속내 만큼은 더 없이 자연을 사랑하고 이치의 순응해 살려하는 도인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혜시에는 위의 7사를 제외하고도 9사가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논의하기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3.2 공손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