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사] 예송논쟁 - 1차 예송논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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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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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예송논쟁 - 1차 예송논쟁을 중심으로
Ⅰ. 서론
Ⅱ. 예송논쟁의 핵심인물
1. 송시열의 생애와 정치
2. 윤휴의 생애와 정치
3. 허목의 생애와 정치
Ⅲ. 예송논쟁의 배경
1. 종법상의 문제점
2. 정치적 배경
Ⅳ. 예송논쟁의 전개
1. 1차 예송논쟁(己亥禮訟)
2. 2차 예송논쟁(甲寅禮訟)
Ⅴ.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송시열의 생애와 정치

1) 출생에서 호란의 치욕까지
송시열(1607~1689)은 조선 14대 왕인 선조 40년(1607년) 충북 옥천에서 송갑조와 곽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이며 호는 우암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학문의 기초를 배우다가 8살 때 부친의 이종인 송이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때 송이창의 아들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였다. 19살 때 이덕사의 딸과 결혼하였고, 22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24살에 되어 상복을 벗은 그는 연산에서 은거하고 있던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더욱 학문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사계가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스승을 1년 만에 잃어버렸다. 다행히 타계한 스승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때 같이 수학하고 교류한 이들은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등으로 훗날 하나같이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27살 되던 해인 인조 11년(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당시 과거시험관으로 우암의 답안 내용을 격찬했던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2년 후에 왕자의 사부로 임명되어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후에 관직을 내놓고 향리인 회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오랑캐에게 항복했던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는 것을 수치로 여겨 아예 황간 땅으로 깊숙이 들어가 칩거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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