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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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예학의 강화
1. 시대적 배경
1) 왜란과 호란의 영향
당시의 조선 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신분제가 동요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사대부들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회복하여 강상(綱常)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기존의 예제와 예정신을 더욱더 엄격히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종법에 기초한 「주자가례(朱字家禮)」를 깊이 연구하고 일상 생활화하여, 유교적 국가 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심산, 2003, p.254~5참조
2) 성리학 발달의 자연스러운 결과
16세기에 성리학이 융성한 뒤 17세기에 예학이 발전한 것은 조선 유학의 전개상 자연스러운 일로서, 성리학 시대를 이어 예학이 대두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성리학에 입각한 17세기 예학정신은 천리(天理)에 따르는 예제의 확립을 추구하며, 성리학의 바탕 위에 예의 형식적 준행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준행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성리학과 예학은 이른바 실천의 관계로 이해 할 수도 있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심산, 2003, p.254~5참조
3)왕실의 전례(典禮)논쟁으로인한 파급효과
인조 대 원종추숭문제(元宗追崇問題)와 헌종 대의 자의대비(慈義大妃) 복상문제(服喪問題) 등 왕실의 전례문제가 제기되어, 조신(朝臣)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이 전례논쟁에 참여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예제와 그 근거 논리가 당시 사대부들의 연구와 저술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심산, 2003, p.254~5참조
2. 예학사상의 근본적 이해
1)천리(天理)와 예제(禮制)
17세기 예학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한다’ 는 이기성정(理氣性情)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리설에 대한 이해 없이는 17세기 예학을 이해할 수 없다. 예학은 성리학의 ‘존천리(存天理)’를 철학으로 하여 천리의 ‘절문’을 밝히고, 사회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理)는 인간에게 내재하며, 이것을 객관적인 예제의 의해 행할 때에 개인, 국가, 세계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예학자들은 예가 단순히 외제적인 규범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이(理)를 발휘하는 수단이라고 인식했다. 예학자들은 예학이 천리에 근거를 두었고, 그것은 인간에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천리와 합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예를 통해 마련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학의 본령은 예를 실천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려는 것이며, 이는 천리에 대한 규명과 체득이 그 바탕이 된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심산, 2003, p261
(2) 예((禮)와 자기 절제의 정신
예학이 추구하는 바는 극기복례를 통해 천인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극기복례는 인간 개개인이 이기심이나 욕심을 극복하고 사회의 객관적인 예제를 준행하여 사회의 안정과 조화를 이루며 이러한 가운데서 개개인의 삶은 완수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예학자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정(私情)을 억누르고 예를 따른다’는 것이다. 예는 자신의 명(明)과 분(分)에 넘치거나 허식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는 극기라는 내성적 수양 과정을 거쳐 사정과 사욕을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극기를 통해 어질고 선한 자기 본성을 깨닫고, 이로써 스스로 자율 의지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자기를 극복하는 수련 자체가 예의 실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극기하는과정이 예를 실천하는 일상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예로써 절제하고 예를 실행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심산, 2003, p263~4
(3)예제(禮制)와 종법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