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 훈구와 사림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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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중세사] 훈구와 사림의 대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여는 말

Ⅱ. 사림(士林)의 등장과 훈구(勳舊)와의 대립
1. 사림의 정계진출
2. 네 차례의 사화(士禍)
3. 사림의 집권

Ⅲ. 사림의 성리학적 향촌질서 주도
1. 소학(小學)의 보급
2. 서원(書院)과 향약(鄕約) - 사림의 기반

Ⅳ. 맺는 말
본문내용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구도는 성종에서 연산군, 그리고 중종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 부각된다. 그리고 명종 대를 마지막으로 훈구는 사라지고 사림이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훈구세력들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세조(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세조를 지지하면서 공을 가진 기존의 집권세력들이었다.
세조가 추구했던 일차적 정치목표는 강력한 왕권의 수립이었다. 그 목표를 위해 세조는 태종의 선례를 많이 원용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본받지 못하였고 그것이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 태종은 자신은 물론 후계자에게도 잠재적 걸림돌이 될만한 대상은 거의 모두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 가까운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을 구축해놓았다. 이것은 그 뒤를 이은 세종이 탁월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부담감이 근본적 원인이 되어, 세조는 집권에 공헌한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 소수의 대신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으며,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그들에게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빈번한 공신책봉은 그런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렇듯 소수의 훈구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된 세조대 후반의 상황은 원상(院相)이라는 변칙적 기구의 설치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세조는 대간의 언론을 강력하게 제약했기 때문에 성종 즉위 무렵 대신(의정부와 육조)에 대항할 만한 비판세력의 존재는 미미했다.
이렇게 세조의 집권을 계기로 형성된 훈구파는 막대한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양민을 노비로 삼거나 양민의 토지를 빼앗는 등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전호(佃戶:소작농)로 전락했으며 훈구파들의 대토지 소유로 중소지주였던 사림파의 지방 기반을 크게 위협했다. 즉 사화(士禍)는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극복하고 명종 말엽에 이르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참고문헌
김범,《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2007.
신병주,《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한국역사연구회,《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1.
이덕일,《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이덕일,《조선 선비 살해사건2》, 다산초당, 2006.
이덕일,《교양 한국사3》, 휴머니스트, 2005.
하고 싶은 말
인터넷검색 하나도 없이, 오로지 책을 참고하여 쓴 리포트입니다.
단어의 뜻정도만 인터넷을 참고하고,
전부 책보고 타자친것입니다. 중복자료 없음을 확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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