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산문] 제갈공명 전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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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고전산문] 제갈공명 전출사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제갈량은?
2. 사건으로 보는 제갈량의 일생
3.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대하여
4.작품해설
본문내용
1. 제갈량은?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이 량(亮)이고 시호는 충무(忠武) 또는 무후(武侯)이다. 전한(前漢) 말 낭야(瑯邪)에서 태어났다. 제갈공명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동생 균을 낳고 얼마 후 제갈공명이 9세 되는 해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도 제갈공명이 1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제갈공명보다 7세 많은 형 제갈근은 계모를 모시고 오나라로 가서 손권의 수하가 되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동생 제갈균과 함께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살고 있는 형주로 가서 살았다. 그후 숙부마저 전쟁으로 세상을 떠나자 제갈공명은 하는 수 없이 양양(襄陽) 교외의 융중산(隆中山) 근처에서 초막을 짓고 살면서, 맑은 날이면 밭을 갈고 비가 오면 책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내다 유비를 만나게 된다.

2. 사건으로 보는 제갈량의 일생
☞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제갈공명이 살고 있던 초막은 유비가 수비하던 신야에서 약 75㎞ 떨어진 곳이었는데, 유비는 친히 세 번을 찾아가서야 제갈공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에 유비는 제갈공명에게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계책을 물었다. 제갈공명은 당시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한 후, 유비에게 먼저 조조, 손권과 더불어 3국 정립의 국면을 만들고,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성)를 취하여 대외적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대내적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면 충분히 패업(覇業)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라고 일컫는 헌책이다. 이때가 유비의 나이 47세이고 제갈공명은 27세 때의 일이다. 이 계책을 들은 유비는 무릎을 치고 크게 기뻐하며,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이하여 날로 신뢰를 더해 나갔다. 이러한 유비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불만을 터뜨리자, 어느날 유비는 두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공명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그러니 그대들도 다시는 말을 하지 말라."
이후 관우와 장비는 더 이상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어원으로, 여기에서 유비가 얼마나 깊이 제갈공명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 정치가로서의 제갈공명
223년 유비는 오나라와의 전쟁에 출전하였다가 병을 얻어 후사를 제갈공명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제위는 아들 유선(劉禪)이 계승했지만, 유선은 평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정사는 제갈공명이 처리해야만 했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의 조직력을 강화하기에 힘썼다. 제갈공명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왕조를 부흥시켜야만 촉이 존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안으로는 내정을 충실히 하며 농경을 장려하는 한편 군사훈련도 게을리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면서, 밖으로는 오나라와 동맹을 유지해 위나라를 경계하는데 힘썼다. 제갈공명이 승상에 임명된 것은 촉한이 건국되었던 221년의 일이지만, 사실상 내정면의 총책임자가 된 것은 유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