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심리, 최면, 꿈] 무의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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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간심리, 최면, 꿈] 무의식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서문 및 개요

-의식 무의식에 대한 간단한 설명. & 둘의 차이.
Ⅱ. 본론

1. 무의식에서 최면 & 꿈 & 기타.
(1) 최면 (사진 &동영상)
ㄱ. 최면이 등장한 배경.

ㄴ. 최면에 대한 개념 (프로이트 & 융의 의견)

(2) 꿈 (사진 & 동영상)

ㄱ. 꿈이 무의식 연구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ㄴ. 꿈에 대한 개념 (프로이트 & 융의 의견)

(3) 기타 개념


2. 무의식의 실생활 사례 및 현재까지의 연구.

-무의식이 어떤 형태로 실생활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

(2) 최면의 오락적인 요소로 인한 대중매체 활성화.

ㄱ. 주변에 알려져 있는 최면의 개념. (여기서 동영상 첨부)



(3) 옛 우리나라 문화에서 꿈의 비중



Ⅲ. 결론


본문내용
-의식 무의식에 대한 간단한 설명. & 둘의 차이.
1) 의식의 정의 : 경험하고 있는 심적 현상의 총체이다. 심리학에서는 개인이 체험하고 그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한다. 체험자 자신에게는 직접적으로 파악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내용을 전해 듣지 않는 한 직접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의 내용을 의미하거나, 또는 알거나 깨닫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의식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나 행동이 모두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2) 무의식의 정의 : 현재의 의식 상태에 나타나 있지 않은 모든 심리적 내용이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남과 얘기하고 있다든지, 생각하고 있다든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의식상태, 꿈, 최면 등과 정신분석이 아니고는 의식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의식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근원적인 의식 등이 모두 이에 포함된다.

3)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점
융의 무의식관은 무의식이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며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는 만큼, 진화의 흔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가.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해 의식에서 무시되거나 잊혀진 내용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듯, 뭉쳐져서 억압된 것, 즉 개인 무의식 차원만을 인정했고, 무의식의 본질이 리비도 (Libido:성욕=인간은 성욕덩어리)에 있다고 보았다. 고로 인간행동의 모든 동기가 파괴성과 성욕에 있다고 보았다(성악설적) 반면, 융은 리비도를 성적인 것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지각, 사고, 감정, 충동의 원천이 되는 에너지(마음의 에너지)로 간주했고, 마음은 쾌감원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 에너지에 의해 자율적이되 일정한 법칙을 따라 조절된다고 하였다.

나.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다. 무의식은 정신병의 근원이고, 의사는 이러한 무의식의 실타레를 풀어 헤쳐서 그 굴레로부터 환자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융은 무의식의 부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측면 또한 중히 한다. 특히 집단 무의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내면의 신비한 세계에 이르도록 하였고, 그래서 융은 이를 종교가 지향하는 영적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채널로 보고 있다 (성선설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