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 법가사상과 묵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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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문화] 법가사상과 묵가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법가사상
1. 개념
2. 사회적 배경
3. 법가의 역사철학
4. 법가사상
5. 법가와 다른 사상
6. 법가의 역사적 평가

◎ 묵가사상
1. 한자 ‘묵(墨)’이 가지고 있는 의미
2. 묵자
3. 묵자의 출신배경
4. 묵가의 탄생, 춘추 전국 시대
5. 유학의 성장과 묵가의 몰락
6.《묵자》라는 책에 대해
7. 묵자의 핵심사상
1) 비공
2) 겸애
3) 비명
4) 절용 ․ 절장 ․ 비악
8. 묵가사상의 문제점

본문내용
법가(法家)사상

1. 개념
(1)법(法)
①법률
②제도
③원칙
④모범, 본보기
⑤방법
⑥불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이치
⑦본받다

(2)법가(法家)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일군(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특히 유가(儒家) 사상과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秦) ·한(漢)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한서(漢書)》 에 의하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형법(刑法)에 의거하여 때로는 육친의 정까지도 저버린 것이 단점이라는 평도 있다. 위(魏)나라의 문후(文侯)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회(李悝:BC 455?∼BC 395?),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商鞅:?∼BC 338), 저서를 통하여 진시황(秦始皇)을 감탄시킨 한비자(韓非子:?∼BC 233), 진(秦)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李斯:?∼BC 210), 전한(前漢)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晁錯:?∼BC 154), 무제(武帝)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桑弘羊:?∼ BC 80)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이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통일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한다.

2. 사회적 배경
초기 주왕조의 봉건사회는 두 가지 규범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되었다. 그 하나는 '예의'요, 다른 하나는 형벌'이다. 예의는 군자 또는 귀족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불문율이었으며, 형벌은 시민 또는 소인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예기(禮記)》에 "예는 서민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벌은 대부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봉건사회는 그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였기 때문에 《예기(禮記)》에서 말한 규범의 실현이 가능하였다. 천자와 제후·대부들은 모두 혈연적 일치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후는 천자와 주종관계를 맺고, 또 각국의 대부들은 제후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귀족들은 세습적으로 특권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세월이 갈수록 이 특권은 자기 윗사람에 대한 충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의 주나라 천자가 다스리는 통치권 내에 종속된 각국들은 사실상 반 독립적 상태였으며, 이들 국내에도 이와 같이 많은 반독립 상태의 '가(家)'들이 있었다. 이들 '국(國)'이나 '가(家)'의 제후와 대부들은 서로 인척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외교적 관계를 맺고, 사건이 발생하면 '군자의 협약'인 불문율에 따라 그 사건을 처리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행위는 '예'에 의하여 다스려졌다.
상위에 있는 천자와 제후들은 직접 백성들과 접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하위의 대부들에게 문제를 해결토록 위임했으며 이 대부들은 자기 지역 내의 백성을 직접 통치하였다. 지역 내의 인구는 한정되었으므로 귀족들은 자기 통치하의 백성들의 실정을 잘 알 수 있었다. 형벌은 자기 신하들을 계속 복종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므로 초기 봉건사회에서의 여러 관계는 상하를 막론하고 개인적인 역량과 접촉의 기반 아래서 유지되었다.
주나라 말에는 이러한 유형의 사회가 붕괴되자 광범위하게 사회적·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군자와 소인계급의 사회적 차별이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현격하게 구분되지는 못했고, 공자 당시에 벌써 토지와 직위를 잃은 귀족들이 있었는가 하면 재능과 행운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탁월한 지위에 오른 평민도 있었다.
이제 사회계급의 낡은 고리는 깨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국의 영토는 공격과 정벌로 점점 더 확대되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대국들은 강력한 행정력을 필요로 하였다. 즉 고도의 중앙 집권력을 가진 정부가 요청된 것이다. 그 결과 정부의 기능과 구조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게 되었으며 강대국의 출현과 더불어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가 허다하게 발생하였다. 그러한 상황은 당시 봉건국가의 군주들이 직면한 상황이었으며, 이 문제를 풀려는 것이 공자 이래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제자백가들이 제출한 해결책의 대부분이 실천하기엔 요원한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군주들이 필요로 한 것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 위한 이성적인 정책이 아니라, 각국이 당면한 새로운 문제를 다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었다.
참고문헌
기세춘, 『천하에 남이란 없다』, 나루출판사, 1995.
김학주, 『墨子』, 민음사, 1988.
박영하, 『묵자』, 풀빛, 2006.
박재범, 『묵자』, 홍익출판사, 1999.
장승구 외, 『동양사상의 이해』,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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