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징비록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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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징비록] 징비록 감상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애 류성룡

2.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객관적 평가

3. 내용 요약

4. 건전한 공동체의 공존양식

5. 스스로를 꾸짖어 후대에 교훈을 준다

6. 맺음말
본문내용
1542년(중종37) ~ 1607년(선조40)조선의 문신 학자이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은 본래 안동부 풍산현 하회리 사람이나 태어나기는 의성현 사촌리의 외가에서, 후일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부친 류중영(柳仲 )과 모친 안동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42년에 탄생했다. 나면서 총명과 예지가 남달리 뛰어 났고 일찍부터 학문에 힘을 써 20세에 퇴계를 찾아가 글을 배웠다.
23세에 사마시에, 25세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1586년 45세 시에는 예조 판서와 형조판서의 두 가지 벼슬을 겸하고 있었으나 항상 부족한 사람이 과중한 책임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여 휴가를 얻어 솔티에 오셔서 상소하여 관직을 면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 남계정사를 지어 계시다가 인동(仁同)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이때 선생의 형인 경암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인동현감으로 있었다. 남계정사에서 매일 시종(侍從)을 인동까지 보내어 문안을 드리게 하고 자신은 10일 마다 가 뵈었는데 큰길로 다니지 않고 산길로 다녔으므로 아무도 재상(宰相)의 행차인 줄을 몰랐다. 선생이 남계정사에서 주역(周易)을 읽으며 검소한 생활로 고생하시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물고기를 갖다 드리니 선생이 말하기를 "듣자니 자네도 부모 봉양하기가 넉넉하지 않다는데 나에게까지 줄 수 있겠는가?"하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그는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扈從하였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훈련도감을 설치, 제조에 올라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선생을 불러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선생은 이를 사양하기를 74회나 되니, 임금님이 선생을 신뢰함도 대단하였고 벼슬도 마다하신 선생의 고결한 성품 또한 대단하다 할 것이다. 고향인 하회와 군위에서 학문과 제자 양성에 여생을 보내면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부모를 위해 효도를 다 하였다.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 등을 남겼다.
하고 싶은 말
지난 학기에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로 작성했던 A+ 보고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