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덕수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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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유적답사] 덕수궁 답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덕수궁 역사

2.주요건물

3.왕궁수문장 교대의식

4.그 밖의 덕수궁에 관한 것들

5.수문장 의상 입어보기

본문내용
- 덕수궁 돌담길로 더 알려진 덕수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덕수궁의 내의 주요건물 들을 살펴본 다음, 한국전통 궁중 문화 재현행사인 왕궁수문장 교대의식과 마지막으로 덕수궁
에 관한 특별한 것들 또한 알아보도록 하자.


서울 중구 중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서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 1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약 6만 1500㎡로 덕수궁 안에는 국보 제 299호인 보루각 자격루가 있고, 보물 제 819호인 중화문 및 중화전, 보물 제 820호 함녕전, 보물 제 1460호인 흥천사종이 있다.
1. 덕수궁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