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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경주 포석정과 문헌자료

Ⅲ. 경주 포석정과 유상곡수

Ⅳ. 경주 포석정과 어무상심무

Ⅴ. 경주 포석정의 연회장 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포석정 일대는 성남이궁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인 것이다. 산좋고 물좋은 부엉골(포석골의 본 이름) 어귀에 이궁을 이었던 것이나, 지금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오직 옛대로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개울가 바위 위에 자리잡은 포석정뿐이다.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이다. 돌홈 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이라 하였다. 또 이곳 포석정에서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침략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 신라 천년의 종말을 내리게 된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포석정이 어느 시대에 무슨 목적으로 지어졌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나, 최근 발굴결과와 여러 정황을 볼 때, 포석정은 삼국시대(통일전)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졌으며, 경애왕이 포석에 나간 것은 견훤이 영천까지 침략해 오자 왕건에게 구원요청을 하고 포석사에 나가 천신에게 제사지내다 변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Ⅱ. 경주 포석정과 문헌자료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포석정에 대한 다른 기록들은 이 두 사료를 참조해서 자신들의 추측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포석정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이 두 사료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내용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이 두 사료에 보이는 포석정 관련 기록을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왕(憲康王)이 또 포석정에 갔을 때[又行鮑石亭] 남산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왕에게만 보일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신)이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 자신도 이를 따라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나타내었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이라고 했으며, 지금까지 나라 사라들은 이 춤을 전해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工人에게 명하여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혹은 상염무라고도 하니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 일컬은 것이다.(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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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저(2001) - 한국 건축의 역사, 기문당
박언곤(1999) - 한국의 정자, 대원사
신영훈, 사진/김대벽 - 목수 신영훈과 함께 하는 우리문화 우리역사 답사기, 대한교과서
이종욱(2000) -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서울 : 김영사
정재훈(1996) - 한국 전통의 원, 도서출판조경
한국고대사학회(1997) - 한국고대사연구, 서울 :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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