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시기 과학기술 정착과 시련(1897~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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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제국시기 과학기술 정착과 시련(1897~1910)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Ⅰ. 근대 기술학교와 관립공업전습소
1. 기술학교의 출현과 침탈
2. 관립공업전습소의 운영
Ⅱ. 관비유학 과학기술자의 등장
1. 정부의 관비유학생
2. 해외유학 억제와 수준 저하
Ⅲ. 하급 측량기술 인력의 양성
Ⅳ. 선교사들의 수공기술 교육
맺음말
본문내용

2. 관립공업전습소의 운영

공업전습소를 관립공업전습소의 명칭은 1910년부터는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로 불리다가 1912년 중앙시험소 설립 이후에는 시험 결과의 실제적 응용에 필요에 따라 ‘중앙시험소 부설 공업전습소’로 바뀌었다.
통해 일제는 당시의 가내공업을 부분적으로 개선하고 그 내용을 여러 지역으로 확산시켜 피폐해지는 농촌을 다소나마 안정화하려는 것이었다. 대상 분야의 선정에서는 한국 지배에 소요될 재원 확충이라는 측면도 다소 고려되었으며, 한국 특산물로서 수출되었거나 장차 유력한 수출품이 될 수 있는 또는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을 품목 등에 대해서 장려책을 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공업과의 직접적인 관련 속에서 일차 가공한 공원원료를 일본이나 국내의 일본인들에게 공급하고 일제 공산품을 생산하여 전파하게 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 밖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일제의 지배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에게 공업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실제의 일에 충실히 전념하도록 할 필요성도 있었다.
[ 관립공업전습소 ]
- 설립목적 :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관비유학생의 수를 줄여 남는 돈으로 실기에
가능한 사람들을 2~3년 동안 간단한 훈련을 통해 양성해 실제 업무에 종사하도록 함.
- 소속 : 학부에서 농상공부로 이관함. 관립공업전습소 졸업생을 실제 업무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요인원의 산정과 졸업생의 용도배치가 잘 이루어져야 하므로 학부에서 산업을 주관하는 농상공부로 이관했다.

- 교육 분야 및 내용 : 농촌의 몇몇 가내공업품(직물, 도자기, 제지 등)에 대한 실제적인 실습을 통해 그것을 개량하고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둠.
=> 이 전습소는 일종의 일본 직공학교와 같은 곳으로 변질되어 1907년부터 운영됨.

관립전습소는 세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① 일제의 공업정책 수립에 필요한 조사 및 시험으로 한국 가내공업의 전반적 실태를 조사하고 그 생산품을 대상으로 각종 시험을 행함으로써 정책수립에 요구되는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② 한국인 공업 자영자 혹은 일본인 공업가들에게 시범적인 실습공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③ 한국 전 지역에서 가내공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고 선전 지원을 할 자영 수공인력이나 기술교사 및 조수를 양성하는 역할을 했다. 졸업생을 각 지역에 자영인력으로 내보내고 일부는 기술교사나 시험조수, 기술관리 등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후 지방에도 자영 수공인력을 대대적으로 양성할 목적으로 최소한의 기술실습만을 속성으로 강습하는 각종 공업전습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지방의 특성에 따라 직물ㆍ제지ㆍ죽기ㆍ목금공ㆍ볏짚 가공ㆍ제탄ㆍ제혁 등의 전습기관 중에서 한두 가지 종류를 선택하여 세웠는데 일제의 직물 장려정책으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직물 전습기관이었고 지역적으로는 전남, 경남 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주요 생산지를 중심으로 통폐합을 거쳐 그 수가 1915년 27개로 줄어든 대신 규모 면에서는 커지는 양상을 나타냈다.

연도
1908년
1909년
1910년
1911년
1915년

4개
6개
9개
100개
27개
관립공업전습소 수

관립공업전습소에 설치된 학과는 염직ㆍ도기ㆍ금공ㆍ목공ㆍ응용화학ㆍ토목과(1910년 임시토지조사기술원양성소로 이관)의 6개 과로서 2년의 수업연한으로 운영되었다. 1908년부터는 수업연한 1년 과정의 전공과가 설치되었는데 염직과는 염색ㆍ기직, 도기과는 도기ㆍ자기, 금속과는 주공ㆍ단공ㆍ판금세공, 목공과는 조가(造家)ㆍ가구, 응용화학과는 화학제품ㆍ분석, 토목과는 측량ㆍ제도로 되어 있었다.
입학생은 15~25세의 품행이 방정하고 신체 건강한 자로 공업가의 자제 또는 장래 공업에 종사할 의향이 확고한 남자들 중 경력과 학력을 가지고 선발하였다. 학생들은 한국정부로부터 실습 대가로 월 6원의 수당을 받았다. 시험과목은 비중 순으로 산술ㆍ일본어ㆍ한문이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구두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며, 지원자들은 졸업 후 공업에 종사하는 데 요구될 자산의 유무도 세밀히 조사받았다. 학과목은 공통과목으로 물리ㆍ화학ㆍ수학ㆍ도화ㆍ일본어ㆍ간이영어가 교육 됐다. 규정 중에는 졸업한 후 1년 동안 전습 분야와 동일한 사업 및 직무에 종사할 의무가 있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급여로 받은 수당의 일부 또는 전부를 상환하여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1907년 실시된 제 1회 입학시험에 1,111명의 지원자들이 몰렸고 최종 입학생은 원래의 입학정원 50명을 크게 넘어서는 67명이 16.5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발되었다. 이렇게 지원자들이 많이 몰린 요인으로는 ① 학비면제는 물론 수당까지 지급되어 경제적 어려움 없이 교육 받을 수 있었고, ② 자격요건에서도 특정한 학력 수준을 요구하지 않아 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지원할 수 있었으며, ③ 이 시기에는 관리로의 입문이 기술교육을 통해 비교적 수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 병합에 즈음해서는 본과 졸업생 중 실제로 공업에 종사하려는 자들이 아주 적은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그 대책으로 특정 부문의 실기만을 가르치는 실과를 만들었다. 입학 자격은 산술을 알고 특히 일본어를 해독할 수 있는 20세 전후의 청년으로 공업에 종사하거나 주요 공업산지에 거주하여 장차 모범적인 직공이 될 자로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지원자에게는 연령, 체격, 학력, 경력, 가업, 재산규모, 지방산물 등을 상세히 기재하도록 했으며,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이와 함께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 병합을 전후하여 공업전습소에서는 식민지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같은해 4월 실과가 신설되고, 제 1회 제작품진열회를 개최했으며 제작품진열회는 실습작업의 관람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고 친근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민족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실시된 것으로 여겨진다.
10월에는 일반 관리가 소장으로 임명되는 일반 관리의 소장 임명은 한국인 학생들의 동요로 말미암아 관리 및 운영 측면을 중시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등의 일이 있었다.
한편 한국인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일제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① 당시 학생들은 일진회 소속 학생들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표출했다. 처음에 학생 기숙사는 일진회 회원 학생들을 여러 방에 분산 배치했는데 일진회 소속 학생이 2명씩 배정된 방의 한국인
참고문헌
박인화, 1983 「구한말 도일관비 유학생에 관한 고찰」『녹우회보』24
이진호, 1994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측량교육」『지적』236
한국교육연구소, 1997 『한국교육사:근․현대편』, 풀빛
최공호, 2000 「관립공업전습소 연구」『한국근대미술사학』8
조지제, 2003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 근대 교육에 미친 영향․역할․평가에 관한 연구」『경남정보대학 논문집』31
김근배, 2005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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