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국근대 과학 기술인력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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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한국근대 과학 기술인력의 출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제 12장 : 공업학교의 확장과 학생근로 동원
제 13장 : 조선인 공업전문학교의 출현
제 14장 : 공장 ‧ 광산 기능 인력의 양성과 손실
제 15장 : 대학 이공학부와 과학기술연구
결론
보론 : 식민지 조선의 과학과 기술
맺음말

본문내용
게 되었고 공업학교 설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성공립보통학교’가 1938년에 먼저 세워졌고, 다음해에 ‘평양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40년에는 공립으로 이리공업학교, 흥남공업학교, 부산공업학교, 사립으로 조선전기공업학교가 세워지며 4개교가 생겨났다. 전체 입학생 수도 1937년 150명 이하에서 1940년 900명으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朝鮮諸學校一覽』(1937~41). 인용
이 같은 현상은 그동안 조선에 2개의 갑종학교만이 15년 전에 설치되어 그대로 유지되어왔던 것에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이 시기에 공업학교가 증가한 이유는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기술 인력의 진출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1939년 일본 본토에 요구한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에 묶인 공과계 졸업생은 약 3,400명 정도였는데 할당된 숫자는 771명에 불과하였다. 이 규모는 요구인력의 23%에 불과했다. 특히 채광야금, 기계, 전기 분야는 600여 명에서 900명의 인력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런데다가 조선으로 배정된 일본인 중 200여 명은 근무를 기피하였다. 외지로 갈 바에는 조선보다 수당이 더 많은 중국이나 만주로 가는 것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朝鮮商工新聞(1939. 5. 12), 조선공업협회는 일본인의 조선 진출 기피문제를 해소하기위해 매년 일본 공업학교 책임자들을 초빙하여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총독부는 일본에만 의지해서는 조선에서 요구되는 기술 인력을 충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공업계 학교를 증설하게 되었다.
공업학교 확충에 관한 논의는 1936년 후반 총독부가 조직한 교육조사위원회에서 개진되었지만, 큰 어려움은 학교의 설립형태와 경비를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공업학교는 두 가지 형태로 유지되어왔는데, 경성공업학교처럼 총독부 지원으로 설립된 관립이고, 진남포상공학교처럼 도에서 설립한 공립이었다. 그런데 농업학교나 상업학교의 설립비용 15만원에 비해 공업학교 설립은 5배에 가까운 70만원이 필요하였다. 釜山日報(1936.8.5). 인용
공업학교는 실험실습비, 운영비 등도 훨씬 더 많이 들어갔으며, 학생정원은 공간문제 등의 이유로 다른 학교보다 적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총독부는 조선에 관립공업학교설립보다 일본 본토에서 졸업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게 유익하다고 여겼다. 공업학교보다 철도리원양성소, 채신리원양성소, 해원양성소, 광업기술실습생 등의 단기 기술강습소의 설립을 선호하였다.
1939년에 설립된 평양공업고등학교의 경우에는 1938년 10월말에 총독부로부터 동의를 얻었고, 일본대장성과 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평남도는 설립경비 80만원 중에서 절반은 국고보조로 지원해줄 것을 총독부에 요청하였고, 나머지는 지방비 20만원과 민간기부금 20만원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平南每日新聞(1938.10.31) : 東亞日報(1938.11.1) 이와 같이 초기에 평남도는 총독부의 재정지원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때 총독부의 계획안은 신설되는 공업학교의 전체경비는 75만원으로 지방비, 도기부금, 총독부보조금 등으로 마련하고자 했다. 총독부는 처음부터 25만원의 보조금만을 지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앞서 세워진 ‘경성공립공업학교’가 전체경비의 절반인 37만원이라는 많은 금액을 총독부로 지원받았던 것은 이 학교가 당시 가장 먼저 설립된 관계로 예외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평남도가 생각하고 있던 학과는 기계과, 전기과, 채광야금과였다. 한때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항공과였다. 당시 평양에는 육군항공대가 들어서 있었고, 쇼와(昭和)비행기 평양공장이 건설되고 있어서 항공 기술 인력의 수요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平南每日新聞(1938.12.7). 인용

평양공업고등학교의 최종설립은 70만원의 재원을 가지고 광산과와 전기과를 개설하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총독부가 결정했던 설립경비 그대로 추진되다보니 개설학과가 줄어든 것이었다. 이때 70만원은 총독부로부터 25만 5천원을 보조받고, 기부금과 평남도 채권을 통해 25만원과 19만 5천원을 확보하였다.
기부금은 공업학교설립 후원의 목적으로 1938년 12월에 결성된 ‘평남공업학교설립기성회’활동을 통하였다. 회장은 일본인이지만 조선인도 포함되었다. 모금 액수가 많아서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목표달성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939년 2월 조직된 ‘부산공업학교설치기성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성에서는 1938년에 기부금모금이 전개되면서 단기간에 공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총독부에서는 기존의 ‘관립공업학교’를 확대하기보다 새로이 ‘공립고등학교’를 신설하는 방식을 택
참고문헌
1. 관보 ‧ 신문 ‧ 잡지
『(舊韓國)官報』,『高宗實錄』,『第一次韓國施政年報』,『第二次韓國施政年報』,『第三次韓國施政年報』,『朝鮮年鑑』,『朝鮮經濟年報』,『朝鮮總督府京畿道統計年報』,『朝鮮總督府官報』,『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朝鮮總督府施政年報』,『朝鮮總督府鐵道局年報』,『朝鮮總督府統計年報』,『統計年報』,『平安南道統計年報』,『平安北道統計年報』,『韓國施政改善一斑』,『韓國施政一斑』,『(韓國)職員錄』,『(日本)科學技術年鑑』,『日本帝國文部省年報』,『日本帝國統計年鑑』

京城新報, 京城日報, 基督新聞, 大韓每日申報, 독립신문, 東亞日報, 萬歲報, 每日申報(每日新報), 釜山日報, 時代日報, 新韓民報, 帝國大學新聞, 帝國新聞, 朝鮮敎育新聞, 朝鮮商工新聞, 朝鮮日報, 朝鮮中央日報, 조선그리스도인회보, 皇城新聞, 新聞切拔, 朝鮮關係, 宗敎, 敎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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