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

 1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1
 2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2
 3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3
 4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4
 5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5
 6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6
 7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7
 8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8
 9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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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13
 14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14
 15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15
 16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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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Ⅰ. 사비유학 과학기술자의 확대
1. 이공계 해외유학생
2. 과학기술 전공자의 진로
3. 과학운동
Ⅱ. 사립공업학교의 성장과 한국인 기능인력 양성
1. 협성실업학교 공업과
2. 경성전기학교와 소화공과학교
Ⅲ. 조선인 광업가들의 기능인력 양성
1. ‘금광열풍
2. 일제의 광업인력 정책
3. 조선인 광업가들의 기능인력 양성
맺음말

본문내용
1. 이공계 해외유학생
일제가 조선인에게 실시한 차별적인 학제와 교과과정은 조선인의 해외유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의 학제는 중등학교까지만 있었고, 일본과 비교하여 3년이 짧아 고보를 졸업했다고 할지라도 일본의 고등학교에 진학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교과과정 면에서도 영어나 이과과정과 같은 과목의 비중은 아주 낮았고 반면 실업 과목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일본에 미리 건너가 예비학교에 다니며 부족한 수학연한을 채우고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비학교의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일제는 조선인의 해외유학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1908년과 1911년에 개정된 유학생규정에 따라 관비생 선발에서 대학교육 이수자는 제외하고 대부분 실업교육 이수자만을 대항으로 함으로써 이들 중에는 대학 진학자가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사비 유학생도 유학생을 통해 ‘불온사상’이 유입, 전파된다는 이유로 유학 단계나 진학과정 자체가 철저히 통제되었다. 따라서 3·1운동 이전까지는 총독부 관비 유학생조차도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19년 3·1운동 이후 크게 변모하였다. 조선인들의 관심 분야가 넓어지며 경제 분야에서는 물산장려운동, 교육 분야에서는 조선인 본위 교육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보이며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가 결성되어 공업의 필요를 선전하는 동시에 지식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보였다. 또한 각종 과학단체가 전국을 순회하며 과학강연회를 개최하여 대중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노력으로 교육에서 가해지던 각종 차별 및 불이익도 완화되어 조선의 중등학교는 점차 일본의 중학교와 같은 교과과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수업연한의 차이와 같은 학제상의 차별도 개선되었다. 유학생규정도 1920년 말에 전폭 개정되어 관비유학생에게만 적용되고 사비유학생은 이러한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선인 유학생이 일본에서 일본의 학생들과 경쟁하지 않고 진학할 수 있는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일본의 관립대학이나 전문학교에 보다 수월하게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유학이 점차 보다 대중화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조선의 중등학교는 그 수가 적고, 전문학교나 대학은 조선인을 입학시키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면 조선보다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 유학은 1919년까지 500~700명 수준에 머물다가 그 이후 1920년 1,230명, 1921년 2,235명, 1922년 3,222명, 1923년 중반 4,503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관비유학생은 1인당 지원비용을 삭감하는 동시에 지원 대상 인원을 늘렸기 때문에 이전의 20%에서 3%로 크게 감소하였으나 사비유학생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지리적인 인접성이나 언어의 자유로움, 관습의 유사성이 일본으로의 유학을 선호하게는 하였으나 보다 새로운 경험이나 학문적 성취를 위해 일본 이외의 국가로도 유학을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중국, 미국, 유럽이 주된 지역이었다. 중국은 지리적 인접성이나 사상 및 생활의 통제가 없는 동시에 학비가 저렴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언어에 있어서의 부자유스러움 등으로 인해 진학 준비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 했고, 고학이 거의 불가능하며 학제도 차이가 있어 대학에 곧바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관립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꽤 까다로웠기 때문에 조선인 유학생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과학기술 관련 학과가 갖추어져 있던 기독교계 학교에서 과학기술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과학기술 전공자로 이공계열로 진학한 사람은 한 해에 평균 2명 정도뿐이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선진과학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동시에 고학이 가능하고 학제의 연계도 비교적 수월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의 후원이나 과학기술의 선진성이라는 인식 때문에 전체 미국 유학생의 약 10.5%가 공학, 9.5%가 이학으로 전공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대학원을 졸업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도 이학 분야에서 4명, 공학 분야에서 1명이 나왔다. 그러나 일제의 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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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황금광시대』살림, 2005.
정세현,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일지사, 1975.
최덕교, 『한국잡지백년3』,현암사, 2004.
한국전력학원, 『수도전기공고팔십년사』, 200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근현대교육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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