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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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과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광해군을 알아보자.(광해군이 대체 누구야???)

2. 광해군일기(광해군이 쓴 일기는 아닐텐데???)

2-1. 광해군 일기의 제작과정

2-2. 광해군 일기의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

3. 선조실록

4. 선조수정실록

5. 광해군일기,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의 비교

6. 그 당시의 정치적 세력의 집권과 영향.

7. 꺼진 불도 다시 보자.(광해군 재평가!)

7-1. 광해군 재평가

7-2. 광해군 묘

8. 출처
본문내용
2-1.광해군 일기의 제작과정
◎1623년 이수광 등이 광해군대의 시정기가 대북파에 의해 작성되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수정할 것을 제의 → 열악한 재정으로 인하여 곧바로 실행되지 못함.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광해군대의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음.
◎소실로 인한 자료 부족으로 난관 → 각처에 흩어져 있는 각종 자료를 수집 한 후에 본격적으로 진행. 춘추관에 수정청을 설치하고 수정 작업에 박차를 가함.
◎시정기를 수정하는 작업 정도로는 서인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음. → 이에 춘추관에서는 시정기를 수정하기보다는 아예 실록을 편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 광해군일기를 편찬하기로 결정.
◎그 해(1624년) 7월부터 편찬에 착수함.(광해군일기는 노산군일기, 연산군일기의 전례에 따라 만들어졌음)
◎1627년 후금의 침입으로 중지되었다. (이때까지의 진척 상황을 보면, 130개월분이 중초본으로 완성되고 그 나머지 57개월분은 초고 상태로 있었음.)
◎이후 5년이 흐른 1632년 다시 편찬사업이 재개되었고 이듬해인 1633년 12월에 187개의 중초본이 완성되었음. 이로써 광해군일기는 10년 11개월만에 일단락을 짓게 됨).
◎중초본을 완성했으니 다시 정서하여 활자를 뽑고 인쇄를 하는 것이 순서였는데 또다시 재정 문제가 불거져서 고민 끝에 인쇄는 포기하고 두 벌의 정서본을 만들었음. 이어 정서한 두벌을 강화도의 정족산과 무주의 적상산에 설치한 사고에 보관했음. 정서하는데 대본으로 썼던 중초본은 세초하지 않고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집어넣었음.
◎ 이것이『광해군 일기』만 유일하게 정서본과 중초본이 동시에 남아 있게 된 배경임.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 민족문화추진회 편(1992~1995)
선조실록 / 민족문화추진회 편(1986~1989)
선조수정실록/민족문화추진회 편(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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