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광해군을 ‘위인’으로 그의 전기를 ‘위인전’으로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과 그의 시대는 이야기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광해군이 결국 실패하였고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삶은 극적인 것이었다. 광해군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간
조선시대에 왕으로 즉위했으나 군(君)으로 강등된 임금은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이들 셋이었다. 이중 노산군은 후에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복위가 되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끝내 `군`으로 남았다. 역사상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광해군, 그는 정말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내용처럼 폭군의 모습
2-1.광해군 일기의 제작과정
◎1623년 이수광 등이 광해군대의 시정기가 대북파에 의해 작성되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수정할 것을 제의 → 열악한 재정으로 인하여 곧바로 실행되지 못함.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광해군대의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음.
◎소실로 인한 자료
광해군일기》광해 즉위년 7월 4일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유례가 없을 만큼 궁궐 등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을 새로 짓고 화려하게 꾸몄다.
1608년 즉위했던 직후, 광해군은 왜란 당시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부왕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하고 창덕궁
2.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평가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엄연히 ‘일기’(폐위된 왕의 실록은 ‘일기’라 칭한다.)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야사에 나오는 내용들이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한국역사(전25권) 13권 연산군 편에는 아예 야사의 내용들로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