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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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박현주 회장 약력

2. 박현주 회장의 투자일생

2.1 27세에 세운 첫 회사

2.2 최고가 되려면 최고 밑에서 배워라

2.3 국내 최연소 지점장

2.4 내 꿈은 10억과도 바꿀 수 없었다

2.5 박현주 1호 탄생

2.6 펀드의 대중화 시대를 열다

2.7 목표는 아시아 1위

3. 박현주 회장의 투자 철학

3.1 모르는 일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3.2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적 계획에 따라 투자한다.

3. 3 기본에 충실하라

3. 4 소수의 시각에서 생각해라.

3. 5 끝까지 투자전문가로 남겠다.

3. 6 최고의 부자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다.

4. 금융업계의 박현주 회장에 대한 평가

4. 1 2007년 칸에 오른 박현주

4. 2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 손실 비난에 박현주 회장 배당금 포기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4&artid=19835&pt=nv


4. 3 박현주 미래에셋회장 로비설.. 정부의 자가당착

5. 박현주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료출처

참고문헌

본문내용
2.2 최고가 되려면 최고 밑에서 배워라

  내외증권연구소는 운영하면서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자산운용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투자자문업을 하고 싶었지만, 법적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86년 내외증권연구소를 접고 제도권인 증권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다. 연구소를 하면서 관리하던 고객들이 있었기 때문에 증권사 여러 곳에서 자리를 제안해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박현주가 밑에서 일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86년도에 증권계 최고의 스타는 동양증권의 이승배 상무(현 한셋투자자문 회장)이었다. 이 상무는 서른두 살에 수습사원으로 출발 해 8년만에 이사가 된 영업직원들의 우상과 같은 인물이었다.
동양증권에 입사한 그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80년 중반만 해도 증권영업이라는 건 루머나 정보에 의한 투자가 대다수였다. 영업직원이 고객을 위해 시장이나 기업을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분석을 토대로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업을 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다른 영업점과 달리 조직을 체계화하고 기업 분석을 강화 했다.


2.3 국내 최연소 지점장

  박현주는 88년부터 한신증권 계열사인 한신투자자문에서 운용과장과 증권사의 상품운용과장으로 일했다.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할 제조업체와 이동통신회사 그리고 롯데제과 같은 저PER주에 투자해 좋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지점 발령을 받았다. 현재 롯데 백화점 본점 맞은편에 위치한 하나은행 본점 9층에 있던 중앙지점이었다. 중앙 지점은 직원이 50명에 달하는 대형 점포 였지만 모든 이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
어느날 지점장이 일신상의 사유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발생 했다. 갑작스레 지점장이 공석이 된 것이다. 그때 상사로 모셨던 유성규 상무가 그를 불러 지점장자리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준비가 안됐다며 거절했지만 유 상무의 계속적인 권유에 수락하게 되었다.
  50여명이나 되는 직원의 절반을 다른 지점으로 보내고 30대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구축했다. 박현주는 직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고 직원들은 연구 과제를 마치기 위해 밤 10시나 11시까지 야근을 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점차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25명의 인원으로 전국 증권사 지점 1000여 개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92년 회계연도 결산일인 3월 31일, 박현주는 숫자를 확인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4 내 꿈은 10억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직을하여 회사 돈을 운용하는 상품계정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할 때 전체 증권사 최고의 수익률을 올려 다른 회사에서 여러 가지 제안을 받았다.
  한 외국계 증권사에서는 연봉 10억 원이라는 매우 파격적인 조건에 스카우트 제안을 해왔다. 차장 시절인 서른 다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10억 원은 지금도 큰돈이지만 당시에는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금액이었다. 그시절에는 서울 강남 아파트의 평당 가격이 350만원 정도였고 지금 수십억원에 이르는 50평대 아파트를 2억원이면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많이 흔들렸다. 그때 박현주 가 연봉이나 자리에 얽매여 자리를 옮겼다면 오늘날의 미래에셋은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상황이 변해도 초심을 잊지 않는다. 인생에서 돈이나 자리보다 더 중요한것은 자신의 꿈이라고 박현주 회장은 말한다.

2.5 박현주 1호 탄생

참고문헌
홍찬선 외 4명, 박현주 미래를 창조하다, 서울, 올림, 2007
박현주,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서울, 김영사, 2007

각주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8/05/200908050376.asp
해럴드경제 기사 2009.08.05일자
http://www.newspim.com/sub_view.php?y=6&searchkey=&cate1=2&cate2=1&ecate=&news_id=100778 뉴스핌 기사 10/24일자,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7/12/28/200712280027.asp
해럴드경제 기사 2007.12.28일자,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4&artid=19835&pt=nv
위클리경향매거진 기사 2009.05.07일자,
http://cafe.naver.com/issaco.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25,
달콤살벌한 경제카페 (http://cafe.naver.com/issaco)

참고자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61859
오마이뉴스 기사 09.06.23,
http://blog.daum.net/bdchun44/15814189 다음카페 스마일,
http://www.miraeasset.co.kr/index.jsp 미래에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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