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사]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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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제관계사] 윌슨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1. 윌슨의 생애

*우드로 윌슨 연표

1-2. 간략한 평가

2-1.19세기 초의 미국의 경제적 상황

2-2,19세기 미국의 정치적 상황

2-3,19세기 후반의 사회적 분위기

3-1. 이상주의 등장의 역사적 배경

3-2.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1) 사상의 출발점

(2) 이상주의의 원칙과 가정

(3) 국제정치와 이상주의

(4)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비교(표)

3-3. 외교사에서의 윌슨의 이상주의 구현

3-4. 이상주의에 대한 비판

본문내용

윌슨의 외교정책은 약소국가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약소국가의 권리와 이해를 존중해주는 것을 그 특징으로 했다. 필리핀 국민들에게 자치(自治) 체제를 갖추도록 준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윌슨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미 의회는 미국선박에 대한 파나마 운하통행료의 면제 법률을 폐기했는데, 이로 인해 영국과의 긴장관계가 크게 완화되었다. 카리브 해의 소요사태에 직면해 미국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1915년 9월 16일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사실상의 보호권을 장악했다. 미국 순양함이 산토도밍고를 사전 답사했고 이어 1916년 여름 미해병대가 이곳에 상륙하여 11월에는 미국 감시하에 새로운 군사정부가 수립되었다. 멕시코 혁명은 윌슨에게 아주 혼란스런 상황을 가져왔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을 독재자의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하게 되자 윌슨은 '관망하며 기다리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상사(商社)들이 요구하는 공식적인 개입에는 반대했다. 1914년 4월 미국 해병에게 모욕을 가하고도 아무런 사과를 해오지 않는 사태에 이어 독일 군함이 멕시코에 군수물자를 하역(荷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해군은 베라크루스의 항만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우에르타 장군 정부가 전복되어도 멕시코 내전은 종식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미국 상사들은 계속 위협을 받았다. 윌슨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는데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16년 3월 게릴라 지도자 판초 비야가 이끄는 군대가 미국 영토 내로 침입해 들어오자 윌슨은 존 J. 퍼싱 장군이 지휘하는 보복원정대의 출정을 허가했다. 멕시코 혁명은 윌슨의 행정부가 끝날 때까지 윌슨을 괴롭힌 문제가 되었다.

1914년 7월 이후 미국의 외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중립국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 윌슨의 노력이 그 주된 내용이다. 공식적인 중립선언에 이어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중립국 국민답게 처신하라는 미국인에 대한 윌슨의 개인적 호소가 더해져서 중립선언의 내용이 강화되었다. 한편 중재자 역할을 자원하고 나선 그의 제의는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고, 비밀 평화협상을 추진하려던 노력은 실패했다. 1915년 2월 4일 베를린 정부는 영국 제도(諸島) 주위의 수역(水域)을 전쟁지역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 내의 모든 교전국 함정을 격침시킬 것이며 중립국의 선박 또한 마찬가지라고 위협을 가했다. 1915년 2월 10일 윌슨은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여 독일 잠수함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독일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상선의 파괴나 미국 인명의 살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립권 침해"로 간주될 것이라고 윌슨은 말했다. 그러나 독일은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여 5월 7일 영국 정기선(定期船) '루지테이니아호'를 사전 경고 없이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격침시켰다. 1,000명 이상의 인원이 익사했고 이중에 128명의 미국인이 끼어 있었다. 윌슨은 전쟁을 피할 목적으로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그 뒤 몇 주 동안에 걸친 협상에 임했다. 특히 독일이 순양함 전투의 규칙을 반드시 지키게 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독일에 대한 윌슨의 항의문은 너무나 강한 어조여서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그 항의문에 서명하기보다는 사임하는 쪽을 택했다. 1915년 8월 '아라빅호'가 격침된 후 독일정부는 앞으로 정기선은 사전 경고 없이 격침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16년 봄 증기선 '서식스호'에 대한 어뢰공격 때문에 독일과의 교전이 임박하게 되자 윌슨은 최후통첩에 가까운 어조로 항의문을 발표했고 마침내 독일정부로부터 잠수함 전략을 전면 폐기하겠다는 포괄적인 약속을 얻어냈다. 그 후 7개월 동안 독일과의 긴장된 관계는 다소 완화되었다.

이같은 외교적 승리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연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191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이 재선되는 데 기여했다. 이 승리는 윌슨이 미국의 중립국적 권리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을 전쟁 참가로부터 지켜냈다"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주장은 미국인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특히 미시시피 이서(以西) 지역에서 높은 호응을 얻었다. 찰스 에번스 휴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공화당은 대(對)독일 문제나 대멕시코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윌슨이 우유부단하며 비겁했다고 매도했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법제개혁(法制改革)이 대중선동적이라고 비판했고, 특히 애덤슨 법을 문제 삼았다. 이 법은 윌슨이 철도파업을 피하기 위해 의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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