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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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한백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생애와 학문경향 2. [동국지리지]의 편찬과 내용 3. 역사인식 4. 사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1. 생애와 학문경향
한백겸은 자가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본관은 청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훈신의 집안으로 내려오다 사람으로 전화한 집안이었다.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민순에게서 학문을 배운 한백겸은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부상(父喪)을 당하고 4년 뒤에 조모상(祖母喪)을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역서(易書) 등을 보며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1586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의 시체를 거두어주었다는 죄로 함경도에 유배를 갔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이어 호조좌랑, 안약현감, 영월군수,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7년 평양에 가 현지를 답사하고 [기전유제설(箕田遺制設)] 과 [기전도(箕田圖)]를 저술하였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대 대표적인 예학자로 추천되어 빈전(殯殿)에서의 일을 맡아 처리하였으며, 공물의 폐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이 내용은 이원익에 의해 채택되어 1608년 대동법으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 해 모상(母喪)을 당해 3년상을 지내고 1610년 서반직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고 서울 근교 서호(西湖) 수이촌(水伊村)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곳에서 1614년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의 저술을 시작하여 죽기 15일 전에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