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부견의 이상주의와 비수지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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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부견의 이상주의와 비수지전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부견의 이상주의와 그에 따른 정책
1. ‘隨才擢授’策
2. 統一天子의 指向과 漢化政策
3. ‘和戎’정책
Ⅲ 비수지전과 그 의미
1. 비수지전에 대해서
2. 東晋經略과 그 意味
Ⅳ 나오는 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처음 ‘부견’이라는 이름을 접했던 것이 올 여름에 동양사 학회의 발표준비를 하면서였다. 그 때 부견이라는 것이 전진의 왕이름이라는 것도 모르고 나라이름인 줄 알고 ‘북연’이라고 검색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가 ‘부견’이라는 것은 그 때 처음 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에 불교를 전진으로부터 받아들였는데 그 때의 왕이 부견이었던 것이다.
다음 비수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역시 학회준비를 하면서 십팔사략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서 100만정도의 군사가 10만정도의 군사에게 패했다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생각을 했는데 그 전투가 바로 비수지전이었던 것이다. 이 비수전으로 전진은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수전과 부견에 대해서 맛만 본 상태에서 위진남북조 수업을 듣게 되고 그래서 이 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Ⅱ 부견의 이상주의와 그에 따른 정책
1. ‘隨才擢授’策

부견정권이 천하를 통치하기 전에 풀어야할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符洪이래 符生까지 3대에 걸쳐 일어난 諸事件들에서 이미 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첫째가 宗室諸王ㆍ氐酋을 비롯한 6夷酋帥와 대신집권자들에 의해 한정되고 있는 왕권의 확립이다. 부생 治世 2년동안은 이러한 현실적 과제를 파행적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의 혼란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견은 이점에서 정책적을 살려서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부견이 즉위하고 나서 취한 정책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실과 氐族豪强의 억압정책이다. 이것을 부생처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종족을 초월한 隨才擢授라는 보다 보편적인 정책을 채용함으로써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채용에는 커다란 난관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종실제왕이 갖고 있는 軍權이었다. 367년 즉위 10년째인 부견은 수도근방의 요지에 주둔하던 종실의 有力將軍들인 符柳, 符雙, 符武등의 반란을 계기로 그 평정에 楊成世, 왕맹 등 종실 외의 장군들을 보내고 그 이듬해 이들을 평정하고 나
참고문헌
姜文皓, 『중국중세정치사연구』, 국학자료원,1999
박한제, 「符堅政權의 性格」
http://monthly.joins.com/-월간중앙에 ‘박한제씨와 떠나는 중국중세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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