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근대사] 1920년대의 사회운동(신간회를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序論
Ⅱ. 1920년대 時代背景
1. 일본의 통치
2. 독립운동
Ⅲ. 신간회 創立背景
1. 민족협동전선론
2. 정우회선언
3. 조선민흥회
4. 중국국공합작의 영향
Ⅳ. 신간회 活動
1. 신간회의 중앙본부
2. 지회조직과 활동
Ⅴ. 신간회 解消
1. 신간회 내부적 모순
2. 일제 탄압
3. 코민테른
4. 시대적 상황
5. 중국 국공합작의 해체에 대한 반향
6. 해소 이후
Ⅵ. 結論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일본의 통치 : 경제수탈 강화와 민족분열 획책
3‧1운동에 직면하여 무단통치의 한계를 체험한 일제(日帝)는 한국인들의 저항을 무마하고 식민지 통치를 안정화해야 할 필요를 실감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일제는 ‘문화통치’로 불리는 통치정책으로 민족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꾀하려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정치적인 변화는 첫째, 총독에 문관도 임명될 수 있도록 개정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같은 시기 대만에는 문관총독이 임명되지만, 한국의 경우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문관 총독이 임명된 예가 없었다.
둘째, 헌병경찰제도가 폐지(閉止)되고 보통경찰제도가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부세력들이 독립 재정을 달성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긴축재정을 강화하여 헌병경찰비를 거의 증가시키지 않은 결과, 3‧1운동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그 실상은 경찰 수와 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셋째,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파악했다. 이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지방통치기관의 자문기구를 설치하여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인 양 선전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 및 자본가와 부유한 상인만이 선거권(選擧權)을 가질 수 있었고, 이들의 친일화를 꾀함으로써 민족분열을 가속화 시키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