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신간회의 창립에서 해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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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간회의 창립에서 해소까지..
목차
1. 머리말 (1) 복대표대회
2. 신간회의 창립 (2) 신간회 지회의 활동과 성격
(1) 민족협동전선론의 대두 4. 신간회의 해소
(2) 정우회선언 (1) 해소론의 논리와 대두
(3) 조선민흥회 (2) 신간회의 해소
(4) 신간회의 창립 5. 맺음말
3. 신간회의 활동
1. 머리말
31운동 후 일본의 유화적인 민족분열정책으로 좌우의 민족운동은 모두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파민족주의 인사들의 실력양성운동은 타협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그 조직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타협주의를 거부하던 민족주의 인사들은 온건한 좌파와 연합하여 이념적으로 중도적인 중앙당(中央黨) 혹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건설하여 분열된 민족운동을 결집하려 하였으며, 좌파에서도 양심적인 우파와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궤멸되었던 조직을 합법적으로 재건하려고 하였다.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에 창립된 일본제국주의 통치하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反日社會運動團體)였다. 따라서 신간회는 31운동 이후 갖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던 민족운동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연구 대상이다. 여기서는 국내의 신간회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 갖는 긍정적 영향과 의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신간회의 창립
⑴ 민족협동전선론(民族協同戰線論)의 대두
민족협동전선론(民族協同戰線論)이란 1920년대 전반기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 세력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전제로 좌파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과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혹은 계급적 입장을 유보하고, 어떠한 형태든지 민족해방을 위하여 협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회주의운동세력(社會主義運動勢力)은 성장 초기 민족진영(民族陣營)과의 협동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계급해방투쟁(階級解放鬪爭)만이 있다는 좌편향을 보였으나, 1924년 4월에 열린 서울파 주도의 조선총동맹의 임시대회에서 혁명적 민족운동은 찬성한다는 내용이 가결되었고 북풍회 또한 그들의 강령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시간적 협동을 기한다는 내용을 밝힘에 따라 비로소 민족협동전선운동(民族協同戰線運動)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1926년 2월 2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13회 중앙집행위원회(中央執行委員會)에서민족해방의 조선독립(朝鮮獨立)과 공산정치(共産政治)의 동일기를 획책하고 민족사회 양 운동자를 통일하기 위한 국민당(國民黨)조직의 전체로서 천도교를 기초로 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최초로 구체적인 민족협동전선의 조직형태를 거론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은 민족주의좌파들을 접촉하였으나 천도교측의 최린의 거부로 인해 구체적 논의는 중지되었다. 이후 2차 조선공산당은 610만세운동 사건으로 궤멸의 위기에 빠졌으나 민족협동전선론(民族協同戰線論)은 3차 조선공산당에 의해 계승되어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으로 나타나게 된다.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 또한 1925년 들어서자 《동아일보》를 통해 민족협동전선에 관한 긍정적 태도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일정한 정치적 힘을 보유한 세력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앞서 민족주의 진영에 힘입어 우익세력 단체인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하였는데, 이에 앞서 이광수로 하여금 《동아일보》에총독부가 허하는 범위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내용의〈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이 논설은 이후 민족주의 진영을 좌파와 우파로 분리시켰는데, 좌파는 민족주의운동을 민족협동전선으로 이끈 장본인들이다. 민족주의 좌파들은 1925년 9월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의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조선사정연구회에 참가했던 인물은 이후 대부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게 된다.
⑵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
북풍회(北風會), 화요회,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등 4개 사회주의단체(社會主義團體)는 1925년 4월에 사회주의단체합동위원회(社會主義團體合同委員會)를 결성하였다.1925년 이들은 민족주의자 중 좌파와의 협동전선을 촉진할 것을 의안의 하나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진회(前進會)가 4단체에 대항하여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를 발기하자, 이에 대비하여 민족협동전선을 펴고자 하는 사회주의단체측이 발족한 것이 정우회(正友會)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