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밸리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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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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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키아밸리 `군주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전은 시대의 산물임과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당대의 문제를 넘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보편적인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그 해결방안을 찾는데 어떤 시사점을 주고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50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인구에 회자되고, 여러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앞자리에 거론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문제 해결에 어떤 보편성과 함께 독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이다. 피렌체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선배인 마르첼레오 비르질리오(Marcelleo Virgilio, 1464~1521)의 추천으로 1498년 5월 28일부터 피렌체 정청에 들어가 곧 제2서기국(내정과 군정을 담당)의 서기가 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외교와 군사 문제에 관계하여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바쁘게 돌아다녔으며, 프랑스․독일․스위스에 파견되는 등 매우 분망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 마키아벨리에게 메디치 가의 복벽은 불운의 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1월 17일, 그는 면직 처분을 받고 피렌체 영내에서 금족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반메디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스테인케 감옥에 투옥되었다. 4월, 교황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의 즉위에 따라 대사령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피렌체에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시의 근교에 있는 산테도레아인 페르구시나의 산장에 거처하게 되었다. 유폐에 가까운 실의와 적막과 무료한 산장생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저작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고 “군주론”, “정략론” 등의 걸작을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1526년 면직 14년 만에 피렌체 방벽 방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1527년 반메디치 폭동이 일어나 메디치 정권은 붕괴되고 다시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새 정부로부터 파면 통지를 받게되어 실의 속에 귀국하게 된다. 1527년 6월 21일, 마키아벨리는 심한 위병으로 불과 몇 일 동안의 투병 끝에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