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화의 유산]올랭피아와 야누스적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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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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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본론

1. 역사적 배경
1) 19세기 프랑스 역사
2) 공화주의자 마네

2. 근대와 인상주의
1) 19세기 중엽 파리
2) 인상주의
3) 보들레르와 마네 그리고 올랭피아
가) 주제의 선택 및 해석
나) 주제의 표현 방법
다) 에 나타난 보들레르의 근대성

3. 당대의 평가
1) 살롱의 풍토
2) 낙선전과 ‘풀밭 위의 점심식사’

4. 근대의 이중성을 폭로한
1) 부자유와 올랭피아
2) 불평등과 흑인하녀
3) 박애의 부재와 검은 고양이

III.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마네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의 파리에 살았다. 마네가 브라질로 항해를 떠났던 1848년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기회주의자였던 루이 나폴레옹이 제2공화정을 세웠고, 1851 쿠데타 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라 칭했다.
루이 나폴레옹의 잔인한 반대파 숙청은 청년기 마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루이 나폴레옹을 혐오하게 되었고, 훗날 당대의 전쟁이나 내전을 그린 그림에서 나타나게 된다. 1851년 폭동 때 마네와 프루스트는 소식을 듣자마자 거리로 나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폈다. 프루스트는 마네와 자신도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며, 살아남은 것이 우연이었다고 회상한다. 마네는 거리에서 공개처형 장면을 목격했고, 이 사건은 마네에게 정신적 외상에 가까운 충격을 주었다. 그는 몽마르트 묘지에서 쌓여있는 시체들을 목격하고, 스케치를 남기는데, 여기서 묘사된 스케치는 1871년 코뮌 실패 후 처형된 코뮌주의자들의 사진과 유사하다.(Reff, Manet and Modern Paris p.225) 공화주의자였던 마네는 사회적 부당함과 폭력적인 억압, 그리고 속물들의 천박함과 제2제정의 가식을 증오한다. 이러한 제2제정은 1870년까지 계속되었다.


마네,

프랑스는 식민정책 중 하나로 멕시코에 군대를 파견한다. 지휘관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의 동생 조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왕자였다.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와, 멕시코 보수파의 추대로 1864년 멕시코 황제에 올랐다. 1865년 남북전쟁을 마친 미군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1867년 철수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을 방임함으로써 그가 처형되는 상황을 야기한다.
마네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멕시코 군이 아닌 프랑스군이 막시밀리안 황제를 처형시키는 모습의 그림을 그린다. 마네는 그림 완성날짜 대신 처형날짜를 적음으로써 이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려 하고 있다. 마네는 1868년부터 1년 반 동안이나 이 그림에 매달렸지만, 정치적 물의를 걱정하여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다가 1879년 뉴욕 호텔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한다.

2. 근대와 인상주의

1) 19세기 중엽 파리와 보들레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는 오늘날의 낭만의 도시와 거리가 멀었다. 계속된 폭동과 봉기는 도시를 파괴된 채 방치시켰다. 거리는 오물로 오염되었고 페스트와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질병이 성행했다. 사람들은 진창으로 변한 거리를 통과하기 위해 하이힐을 신고 다녔고 지독한 악취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사용했다. 이러한 파리의 모습을 정비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재건할 계획을 세우고 프랑스의 시장으로 오스만을 임명한다. 그는 파리도심개발사업(1853~70)을 추진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으로 파리를 변모시킨다. 하수도를 정비하고 폭동 진압에 용이하도록 방사형의 도로를 건설했으며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구획을 만들었다.
19세기 중엽의 파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대중들이 모더니티를 인식하고 진보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1789년 대혁명 이래로 몇 차례의 전쟁과 혁명을 통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산업과 경제,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며 근대화된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던 파리에는 보수파 귀족들, 지주, 자본가에서 공장 노동자와 빈민층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계층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민주화로 인한 사회적평등과 과학과 산업을 통한 진보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부르주아들이 중요한 계층으로 부각되었다. 황제의 야심대로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화려한 외관과 시설을 자랑하게 된 파리에서 부유한 중산층 부르주아들과 고급매춘부들을 비롯한 사교계 여인들은 “제국의 축제”라고 불리는 화려한 시기(1852-59)를 즐겼다.
한편, 절반을 짓기 위하여 나머지 반을 헐어내는 대대적인 파괴 작업의 여파로 직장과 거주지를 잃은 많은 노동자들과 빈민층들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도시 빈민들은 특수 지역을 형성하였고, 유랑자와 범죄자들이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도시의 이러한 어두운 면들을 알고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오스만의 무관심을 비난하였다.
시민들의 반감 그리고 좌파인 노동자 계급과의 갈등은 1867년의 재정적 위기와 겹쳐져 제 2 제정은 어려운 시절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실감과 새로운 가난과 차별은 진보의 개념인 근대화의 모순된 현실이었다. 우아한 삶의 장관과 새로운 불행과 소외로 가득한 파리는 혹자에게는 즐거움과 흥미의 도시였고 혹자에게는 외로움과 불안의 도시였다.

2) 인상주의

참고문헌
박정자,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기파랑, 2009

에두아르 마네 외, 『뒤늦게 핀 꽃』, 강주현 역, 창해, 2000

보드리아르, 『파리의 우울』, 윤영애 역, 민음사, 2008

제프리마이어스, 『인상주의자 연인들』, 김현우 역, 마음산책, 2007

버나드 덴버 편, 『가까이에서 본 인상주의 미술가』, 김숙 역, 시공사, 1999

배영수 편, 『서양사 강의』, 한울, 2000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1983

이주연, 『마네의 연구: 보들레르의 영향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