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그 기만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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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성애 그 기만을 넘어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 주제에 대해 사색하고 글을 쓰는 과정은 마치 집을 짓는 과정과도 같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지식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질서를 만들어내어 마침내는 하나의 체계를 일구어내는 작업의 성격이 건축 자재를 한데 모아 설계에 의거하여 집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기거할 곳이 없어 사글세방을 전전하는 가난한 부부에게야 집이라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겠지만 건축을 공부하고 미학을 공부한 설계가의 눈에는 집이 모두 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글이라고 다 글은 아니다. 집에도 품질이 있듯이 글에도 품질이 있기 때문이다.
품질 면에서 최고이기를 바라는 심정은 필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연한 욕심일 것이다. 필자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이 주제를 다룬 세 달여 동안 최고의 품질을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확언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최선이 글의 품질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품질에는 최선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많은 비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글은 단순하게 기윤실 대학생위원회 1기 수료를 기념하기 위한 심포지엄 발표용으로 씌어지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담아내 보려는 시도가 농축되어 있다. 어쩌면 이 작업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해나가야 할 지극히 공적인 사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준엄한 비판이 필요하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어 봐주기 식의 비판은 단호히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시제는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필자가 느꼈던 몇 가지 한계를 미리 밝히고자 한다. 먼저 자료의 부족을 들 수 있다. 필자가 인용한 대부분의 자료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편집했던 것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분량도 많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의 형태였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짐작컨대는 그 자료들 외에 훨씬 많은 자료들(동양의 자료와 일반적인 문화에 대한 자료 등을 포함)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거기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관계로 인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밝혀졌거나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희박했다. 그래서 부득불 동성애자들의 자료를 인용할 수밖에 없었고, 가족 제도의 정착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들의 논리를 좇아가는 것이 것이 불가피했다.
다음으로 윤리의 문제를 총괄적으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너무 무모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겠다. 무모한지를 알면서도 이 작업을 감행한 이유는 필자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대답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비판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해체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해체는 언제나 손쉬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해체가 건설을 위한 것이라면 해체 이전에 건설을 위한 계획(Masterplan)이 있어야 할 것이다. 건설적인 비판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비판이 건설적이기 위해서는 그 비판을 가능하게끔하는 좌표로서의 원점이 진작에 설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비판을 진척시켜 나가며 이러한 원점에 대해 목말라 했다. 동성애의 기만 저편에 있을 원점은 과연 무엇일까가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원점이 썩 잘 드러난 것 같지는 않다. 아무쪼록 필자보다 더 능력있는 분에 의해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체계화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여러 미숙한 면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햇빛을 보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먼저 이 주제를 다룰 용기를 준 서울대 학생신앙운동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시도가 없었더라면 아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함께 고민해온 기윤실 대학생위원회 동료들과 지루한 교정을 마다하지 않은 기윤실 식구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난삽한 논문을 꼼꼼히 읽어가며 귀중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해정이와 김광자 집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사실 되돌아 보면 논문을 쓰기 위해서 필자가 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모두의 생각들, 선배들의 고민들, 동료들의 노력들을 한데 모아보는 역할 이상은 아닌 듯하다. 아무쪼록 필자의 이 수고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만일 그 이상의 도움이 이 글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은혜일 것이다.
Ⅰ. 서론
80년대의 이념 논쟁이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성(性)논쟁’이라 할 수 있겠다. 군사 정권의 권위주의 시대의 종말과 함께 그동안 억눌려 있던 사회 각 분야의 욕구들이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했는데, 성문제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존의 규제 위주의 가치관들이 공격을 받고 새로운 이론과 질서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80년대 말 스포츠 신문의 본격적인 등장과 그 음란성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된 일련의 성논쟁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벗기기 연극 ‘미란다’, 음란 잡지 ‘펜트하우스’ 등 굵직굵직한 마디마디를 거쳐왔다. 그러는 중 1995년 봄부터 드디어 동성애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이 문제는 독립된 장르로서의 담론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방송과 언론은 이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고, 각 대학마다 동성애자 동아리가 만들어졌거나 준비중에 있으며, PC통신에서도 토론의 주제로 올라 폭발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의 토론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현학적이다. 동성애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 나라는 아직 동성애에 대해 - 호, 불호를 물론하고 - 사회적인 개념조차도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은 서구에서 알려진 이론들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여과 없이, 소화시키지 않고 내보내고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동성애 논쟁을 살펴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뱉는 첫 마디는 ‘어렵다’이다.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낯설기만 한 논리전개를 추구함으로써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주눅(?)을 들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를 비롯하여 동성애에 대해 반대 입장에 서 있는 단체들은 걱정만 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다. 단편적으로, 사석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고는 있지만 아직 공개적이고도 적절한 대응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렇듯 성도덕이 문제가 되어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고 이에 대해 기독교계 등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행위 일반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관이 더 이상 현실 문제를 다룰 수 없게 되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지식층의 사람들 중, 심지어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기존의 기독교적 접근에 심각한 결점이 있거나 아예 틀렸다고 확신하게 된 사람의 수가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하게 명확한 도덕적 목표에 부합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기 위한 토론이 아니라, 인간의 성이 제공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목표를 결정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혼전순결, 이혼, 재혼, 동성애 그리고 기타 다른 성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토론은 인간의 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토론이 더 이상 아니다. 그들은 이제 인간의 성적인 행동 자체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성은 인간 됨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다. James P. Hanigan, Homosexuality: The Test Case for Christian Sexual Ethics (New York: Paulist Press, 1988)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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