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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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연애문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1. 전통사회의 연애문화
-시대별 연애문화 개괄
1)삼국시대
2)고려시대
3)조선시대
4)이후 사례 소개


2. 현대사회의 연애문화
-연령별 연애문화
1)청소년
2)대학생
3)성인
-국외(유럽)의 연애문화 비교
-매체와 연애문화



맺으며

본문내용
(3)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조선시대는 연애, 사랑 여색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성리학이 조선시대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대부는 여자를 돌같이 보아야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져드는 것마저 경계했다. 혼례도 중매자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고 남녀는 반드시 내외를 해야만 했다. 조선시대 판 섹스 스캔들이었던 유감동과 어을우동도 자세히 살피면 억압된 성으로부터의 탈출, 순종만을 강요당한 조선시대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욕망을 억압하면 병이 되고 자유를 위해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근친상간이 유난히 많았고 지엄한 구중궁궐에서는 여인의 암투가 치열했으며 궁녀의 동서애도 흔했다. 아름다운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여인이 부모에 의해 남편과 혼례를 올린뒤 죽을 때까지 해로하면서 일생을 오롯이 남자에게 바쳐야 했다. 신분과 제도가 여성을 일부종사하도록 강요했고, 여기서 일탈하면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인 신분의 억압과 제도의 굴레 속에서도 가을 호수처럼 맑고 깨끗한 사랑을 한 이들도 적지 않다. 기생 매창과 유희경의 아름다운 사랑도 있고, 남편이 죽은 뒤에 아름다운 사랑의 글을 써서 무덤 속에 함께 넣었던 이응태의 부인 원이 엄마의 사랑도 있다. 원이 엄마의 편지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 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조선시대에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간음한 일이 의외로 많이 일어났다. 조선이 예의의 나라이고 충효의 나라여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조선왕조실록] 이나, 살인사건을 집대성한 [흠흠신서] 등을 살펴보면 이 생각은 여지없이 깨진다. 조선은 부권의 나라였다. 아버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첩을 여럿 거느렸다. 첩은 비교적 젊은 편이어서 큰아들보다 나이가 적은 경우도 흔했다. 광해군 때의 문신 정인홍의 문인으로 영의정 유성룡을 탄핵하여 남인 정권을 무너트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홍도는 광해군 때는 서인 정권까지 붕괴시키는 데도 악역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그의 큰아들 문신이 아비의 첩과 간음을 하면서 경상도는 물론 전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조선시대에 남녀 간의 사랑은 신분제도와 유교의 영향으로 종종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조선은 폐쇄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좀처럼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서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다. 천민들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을 구애 받지 않았으나 양민 이상은 엄격하게 내외를 해서 제삼자가 중간에 끼어 있지 않으면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어려웠지만 일단 만나기만 해도 예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어 지탄을 받거나 음란하다고 하여 처벌을 받았다. 양민 남녀들은 원칙적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남녀의 만남이 자유로웠던 근친 사이에서 연애가 이루어져 발각되면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사회가 용인하는 일반적인 사건은 보편성을 갖고 있어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을 넘어버리면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이 된다. 연애와 성도 보편성을 초월하면 실록에 기록되어 역사로 남는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남녀의 사랑이 실록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사관은 아름다운 사랑을 기록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랑이나 간음, 불륜, 패륜을 기록했다. 이는 조서시대의 지배 이념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충, 효, 예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이 식거나 변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원칙적으로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여서 많은 부부가 애정이 없어도 함께 살았다. 사대부나 지배층 남자들은 첩을 두고 기생집에 출입하여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가고는 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혼을 하는 일도, 사랑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애정이 없는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애정이 평생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행복이다.





참고: 이후의 근대사회의 연애

- 1930년대 '신가정' 이라는 여성잡지에서 발췌

참고문헌
고윤희 / 연애 잔혹사 : 우리시대 남녀 짝짓기 프로젝트 / M&K / 2007
이동준 / 연애를 인터뷰하다 / 웅진씽크빅 / 2008 /
최평길 / P세대 = Pragmatic generation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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