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이란 무엇인가 -이해화(理解化)된 단군, 상징화(象徵化)된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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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군이란 무엇인가 -이해화(理解化)된 단군, 상징화(象徵化)된 단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서론 : 단군이란 무엇인가 - 진짜 단군이란 존재하는가?

2. 우리는 단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 이해화된 단군, 상징화된 단군

3.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다?

4. 단군 조선은 방대한 영토의 통일 민족국가이다?

5. 단군은 역사적 실재인가?

6.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단군에 대한 역사를 연구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볼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시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백남운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학자들은 이 같은 관점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조선사회경제사󰡕에서 단군이 ‘오랜 옛날에 실재했던 민족 시조’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나 신채호의 인식처럼 단군이 조선 인식의 출발점, 즉 ‘국조(國祖)’일 수는 없으며 이러한 시각은 하나의 특수 사관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한 북한의 단군 인식 방법은 ‘단군은 준민족의 원시조’ 개념이다. 이 같은 논리는 근대민족에도 ‘시조’가 있을 수 있느냐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하는데, 이는 북한학계에서의 민족이란 어느 경우에도 근대 사회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박광용, 「단군,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 역사를 의심하다󰡕, 서해문집, 2002, p. 22
.
‘계급 사회에 대한 부정’이라는 사회주의 역사가들의 민중 사관에 굳이 기대지 않아도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서 바라보는 시각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엿보인다. 무엇보다 근대적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자각 자체가 없던 시절을 살았을 단군이 어떻게 ‘민족의 기원’인 단군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민족 시조’의 인식 문제는 충분히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짖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관용어는 근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서 앞서 언급한 ‘서양의 민족주의 개념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개념들이다.
따라서 ‘민족 시조 단군’은 근대를 살았던 사람들, 즉 ‘민족’이라는 개념이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선택되어진, 만들어진 하나의 상징에 가깝다.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기는 대부분의 연구 성과들은 그 기원을 모두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위의 저술들이 고려의 ‘대몽 항쟁기’에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쓰인 저술이라는 일종의 ‘오해 혹은 왜곡’ 때문이다. 󰡔삼국유사󰡕, 󰡔제왕운기󰡕에는 오늘날의 민족 개념 혹은 비슷한 것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으며, 단군을 오직 ‘처음 나라를 연 사람’ “初誰開國啓風雲” - , 󰡔제왕운기󰡕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할 점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쓰인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오늘날의 그것처럼 ‘국가≒민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고대 사회에는 ‘민족’의 개념 혹은 ‘민족 시조 단군’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단군이 민족 개념을 확립하려는 사람들에게 ‘선택되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기자와 기자 조선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원문을 살펴보면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의 서술이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연구 양태는 기자와 기자 조선에 대한 연구보다는 단군 조선 쪽으로 그 중심이 기울어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한사군과 기자 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 “前史에는, 壇君王儉 1220년 後에 ‘箕子의 王朝鮮’을 기재하였으나, 箕子는 箕子 자신이 王됨이 아니요,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朝鮮王」이 되었나니, …이제 史實을 따라 箕子朝鮮을 削하노라.” - 신채호, 󰡔조선상고사󰡕
하고 있는데 이후의 많은 주장들이 신채호의 논리에 따라 기자 조선을 부정, 혹은 암묵적으로 무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