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사상의 재해석을 통한 여성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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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교 사상의 재해석을 통한 여성인권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여성인권운동/현황)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 국내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 조사

가. 여성인권과 남녀평등 수준에 관한 사회적 인식 조사(현황)

나.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개인의 경험 및 태도 조사(1)

- 여성인권 사례

1. 고용기회의 불평등

2. 승진기회의 불평등 (여성정책 연구원, 여성관리자 패널 조사 결과)

1) 여성 임원 아직도 0.7%에 불과 (100인 이상 기업 269개 기업)

3. 임신, 출산 휴가 문제

- 유교권 국가의 여성인권과 여성운동 성공 사례

- 국내 여성운동 사례와 문제점

한국여성운동(70년대 이후)

2. 한국에서 여성의 인권이 낮았던 것만은 아니다 (고려시대)
3. 조선 전기와 후기 여성 인권의 약화 이유
- 병자호란/임진왜란 + 성리학의 영향

-성리학자들의 여성에 대한 관점
4. 우리나라에 페미니즘이 들어온 이후의 여성 관점의 변화

5.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유교의 여성 억압적인 요소

1) 서경에서 나타난 구절
2) 『주역(周易)』에서 나타난 구절
3) 예기(禮記)에서 나타난 구절
4) 논어(論語)에서 나타난 구절
6. 유교가 없어지면 여성 인권이 신장될 것인가? —기독교와 불교의 사례 비교
- 불교의 8존사법(八尊師法)
7. 유교 사상의 재해석을 통한 여성인권의 새로운 확립



본문내용
3. 조선 전기와 후기 여성 인권의 약화 이유
- 병자호란/임진왜란 + 성리학의 영향


조선 전기
조선 건국 당시 통치 이념은 ‘유교’ 였으나 여성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음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 대전]을 보면 남녀 차별 없이 재산을 균분해서 상속하라는 규정이 있음. 조선 전기의 경우 남녀평등 상속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음.

아래는 조선 초기와 후기, 재혼과 관련한 재미있는 두 기사를 옮겨 온 것이다. 재혼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던 김씨 부인과 재혼한 것이 도리가 어긋난다고 깨닫고 있는 시골 아낙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조선에는 왜 이처럼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된 것일까?


조선시대 여성의 재혼에 대한 태도 변화

사례1) 조선 초기
사헌부에서 영돈녕부사 이지를 탄핵하였으니 그가 죽은 중추원부사 조화의 처 김씨를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문하시랑찬성사 김진의 딸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음탕하였고 나이가 들면서 더하였다. …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에서 다시 탄핵한 것이다. 그러나 왕은 이 문제를 듣고 말하기를 “처 없는 남자와 남편 없는 여자가 서로 혼인하려는 것을 왜 반드시 문책해야 하느냐? 더구나 이지가 계실을 취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니 다시는 논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처음에 김씨는 이지와 몰래 혼인하고자 하여 아들 조명초에게 알리지 않았다. 혼인날 저녁에 이지가 오자 명초는 비로소 이를 알고 이지의 목을 잡고 함께 땅에 엎어져 울면서 막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김시는 첫날밤을 지내고 다음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이 늙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 늙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김씨의 나이는 당시 57세였다.(『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 11월 갑오).

사례2) 조선 후기
영도에서 온 부부가 서울의 한 선비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주인집 아들이 를 배웠는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에 이르러 서당의 선생이 풀이를 해주자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여자가 그 말을 들었다. 날이 저물자 여자는 선생을 찾아가 낮에 그 말에 대해 더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서당의 선생이 재차 설명을 해주자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의 도리를 이제야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와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여태까지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헤어집시다.” 여자가 개가하여 지금의 남편을 따라온 것이었고, 둘 사이에는 이미 젖먹이 아이까지 하나 두고 있었다. 남편이 놀라서 까닭을 물었다. 여자의 대답인즉 이러하였다. “전날 당신을 따랐던 것은, 여자란 지아비를 잘 섬기면 그만이라고 알았기 때문인데, 오늘에야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는 도리를 알았으니, 이제부터 몸을 깨끗이 지켜 돌아가신 남편에게 보답해야겠습니다. 당신 아들은 어려서 품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으니 몇 년 기른 뒤 데려 가소서. 그러면 당신에게 충분히 보답이 될 것입니다.”(『이항견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