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친일행각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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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광수 친일행각과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 이광수는 누구인가?


2) 이광수의 생애

2. 이광수의 연도별 친일행각

1) 1909년 : 친일의식의 단초「사랑인가」

2) 1916년 : 독립운동가의 우매함을 비판한「대구에서」

3) 1922년 : 조선 민족의 갱생을 주장「민족개조론」

4) 1924년 :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민족적 경륜」

5) 1937년 : 변절의 기점이 된「수양동우회 사건」

6) 1940년 : 창씨개명「창씨와 나」

7) 1940년대 : 전시협력체제 하의 이광수의 작품

3. 독립운동가로서의 이광수

< 참고문헌 >


본문내용
기화로 세계여행 목표로 한만국경을 넘어 정인보와 상해로 간다. 1914년에 주필, 주필, 편집, 등에 참여하여 언론 활동을 한다. 다음 해, 김성수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한다. 1919년 1월에 를 기초하고, 상해로 탈출, 신한청년단 조직에 가담한다. 신익희, 손정도 등과 소장파의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 조직에 협력한다. 도산 안창호와 만나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맡는다. 그는 안도산의 이념에 감명을 받아, 그를 보좌하여 을 초한다. 춘원은 조동우, 주요한의 협력을 빌어 임정 기관지 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한다. 1921년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고, 1922년에 수양동우회를 발기한다.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친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39년, 친일문학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이 된다. 1941년 말에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 연설을 하고 다닌다. 1943년 조선문인국보회 이사로 를 써서 학도병 지원을 권장한다. 1945년 사능에서 일본의 패망을 접하고 상경, 재만혁명동지회를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하다, 다시 사능에 칩거하며 독서와 영농 등으로 소일한다.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최남선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다.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두문불출하며 집필을 시작, 1950년 59세의 나이로 공산군에 끌려 가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 당한다. 이때 심한 동상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홍명희의 도움으로 인민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한다. http://cafe.naver.com/cjs2470389.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5&




2. 이광수의 연도별 친일행각
1919년 이전
1919 ~ 1921년
1921 ~ 1937년
1937년
1939년 이후
제 1단계
임시정부에서
2년 동안의
독립운동
제 2단계
수양동우회 사건
제 3단계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정신
민족개량주의,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
의례준칙의 일본화, 생활방식의 일본화



참고문헌
< 참고문헌 >

「친일파 99인」.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 그 과거와 현재」. 반민족문제연구소.
「이광수의 친일문학 연구」. 이경훈 저. 태학사. 1998.
「이광수 문학의 재인식」. 문학과사상연구회. 소명출판. 2009.
「이광수와 그의 시대 1,2」. 김윤식 저. 1999.
「영마루의 구름 - 춘원 이광수의 친일과 민족보존론」. 김원모. 단국대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