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연변 조선족 발표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I.
1. 조선족 명칭의 기원, 역사, & 배경
2. 연변 조선족의 거주 지역
II.
1. 연변 현지 상황
2. 조선족의 정체성
3. 조선족과 한국의 관계
III.
본문내용
I.
1. 조선족 명칭의 기원, 역사, & 배경
청나라 초기에 만주인들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많은 만주인들이 중국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주인들이 만주지역을 선조의 중요한 땅으로 여기어서 한족들의 만주로의 이주를 금지하였다.
청조 시대 때에 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가난과 궁핍함을 제거하고자 대거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불법이주”를 하였다.
청나라는 이 때문에 조선과 국경분쟁이 생기어 월강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북부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월강을 하여 살 길을 찾아 나섰다. 참고로 월강 죄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1883년, 서북경락사 어윤중은 많은 백성들이 월강 죄의 대가를 알고도 북으로 향하는 급박함을 알아차리어 월강금지령을 폐쇄시킨다.
게다가 청조에게 조선인들의 만주지역의 급격한 인구성장과 조선인들이 일구어낸 토지를 다시 황무지로 바꾸기 아까우니 조선인들의 거주를 승인하라고 요청을 하였다.
청조 역시 북쪽의 나라들의 공격과 연변을 개강코자 하는 마음에 1885년 봉금령을 폐지하였다.
이 때의 더욱더 많은 조선인들이 북으로 이주하였으며 1900년대 초까지는 별 문제 없이 중국인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러나 1910년, 우리 나라와 일본의 강제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지게 된 일본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이 이유로 많은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그때부터 중국으로의 이주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정치망명의 성격들을 가진 이민자들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조선인들의 인구통계를 보면 1907년에는 7만 명, 한일강제합병이 이루어진 1910년에는 10만 명, 1916년에는 20만 명이 넘었으며, 1920년에는 45만 9천여 명이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항하고자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땅에다가 학교를 설립했으며 그 숫자가 1926년의 통계를 볼 때에는 자그마치 191개가 된다고 한다.
1931년 9.18 사변이 일어난 뒤에 중국의 동북쪽의 지방은 완전히 일본의 주도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건립하여 중국인들은 물론, 조선족들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2차 국공합작에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선언하였고, 일본인들에게 억압을 받던 조선족들도 중국의 편에 서서 조선인유격대라는 명칭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일본군은 한국과 중국 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족들에 게의 기쁨도 잠시,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내전을 시작함으로써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함과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함으로써 중국공산당 측은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을 1952년에 발표하였다.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은 중국공산당이 지정한 55개의 소수민족에게 자치권을 허락하는 정책으로써 지린성 동부의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명칭이 바뀜으로써 조선족들이 자치주의 주장(州長)이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조선족들을 위한 연변대학이 자치주의 중심 도시인 옌지에 설립되었다.
하고 싶은 말
좋은 성적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