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거장 연암과 다산의 문학 저서와 시문을 중심으로 박지원 생애 정약용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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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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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학의 거장, 연암과 다산의 문학
저서(著書)와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Ⅰ 서론
Ⅱ 본론
1. 박지원과 정약용의 생애
1.1. 연암 박지원
1.2. 다산 정약용
2. 연암과 다산의 대표작
2.1. 「허생전」
2.2. 「목민심서」
2.3. 「허생전」과 「목민심서」의 비교대조
3. 연암과 다산의 한시(漢詩)
3.1. 연암의 한시
3.2. 다산의 한시
3.3. 연암과 다산 한시의 비교대조
Ⅲ 결론 -연암과 다산, 그 의의와 시사점
Ⅰ 서론
16세기 말,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전후하여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집권층은 여전히 성리학을 최고 이념으로 내세워 기성 질서를 회복 유지하려 하였으며, 도덕적 명분론과 정쟁(政爭)에만 몰두하여 부국강병과 민생 문제를 등한시하였다. 물질문명의 낙후와 사회적 갈등은 참으로 심각한 지경에 달하였고, 현실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채 무능함을 드러내기는 학계나 사상계 역시 정치권과 다를 바 없었다.
대체로 16세기 전반까지 민족 문화의 창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성리학적 사림문화는 나름대로 긍정적 의의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로는, 즉 선조 즉위와 함께 사림(士林)이 집권한 이후로는 점차로 이 긍정적 의의를 상실하고 타성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종래 보여주었던 강력한 현실 비판적 정신을 상실하여 갔다. 특히 성리학자들은 주자학 일변도의 경화된 학풍 속에서 민중의 실생활은 도외시한 채, 형이상학적 담론에만 몰두하였으니,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경장(更張)을 외쳐야 할 정도로 중쇠기 현상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재야의 일부 선각자적인 유학자, 특히 남인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머무른 주자학 일변도의 학풍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서 부국강병과 민생 안전을 달성해야 한다는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이른바 실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목적은, 안으로는 당면한 국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중을 도탄에서 구제하며, 밖으로는 급변하는 국세 정세에 대처하여 국가 역량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 실학 운동에는 많은 실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여기에는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박지원과 민본사상을 가지고 백성을 항상 생각했던 정약용 등 실학의 거장들이 있다. 오늘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들의 대표 저서인 『허생전』『목민심서』, 그 외의 문학작품에 관해 알아볼 것이다. 시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지원과 정약용은 어떤 자세로 시대에 적응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자.
Ⅱ 본론
1. 박지원과 정약용의 생애
1.1. 연암 박지원 (1737~1805)
북학파의 거성인 연암 박지원(1737-1805) 서울의 서쪽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16세에 처음으로 처삼촌인 이양천에게 글을 배웠다. 영조 36년 할아버지 사망 후 생활이 곤궁해졌으며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였다. 영조 44년에 (1768) 백탑 부근으로 이사, 박제가, 유득공, 홍대용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그는 일찍이 우암 송시열 일계의 고루한 학자들이 존명사상에 얽혀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유명무실한 북벌론을 부르짖음에 반하여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산천, 풍토와 문물, 제도에 대하여 오랫동안 염모하였는데, 급기야 그 숙원이 이룩되어서 그들의 통도, 요새를 신력하고는 더욱 자신이 만만하여, 모든 역사, 지리, 풍속, 고거, 건설, 인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학, 예술, 고동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고정된 하나의 틀로써 만 가지를 강요하는 과거 제도를 비난했고, 벼슬하는 일에도 초연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호방하고 워낙 사람을 좋아했던지라, 곁엔 늘 지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흔히 연암은 다산 정약용과 비견되곤 한다. 정약용이 벼슬하길 좋아하고 체제 순응적으로 살았다면, 연암은 양반이면서도 양반을 풍자하고, 벼슬엔 초연했다.
1.2. 다산 정약용 (1762 ~ 1836)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한강변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씨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형제들은 학문적 재주가 있어 실학과 서학(천주교)에 일찍 눈을 떴으나 꽉 막힌 시대와 당쟁에 희생되고 말았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서 학문의 뜻을 굳게 했다.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다. 다산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이 시작됐다.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곡산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서의 치적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며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다.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다.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민(民)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자,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살며 자신의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훗날 인정해주길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