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분석] 서재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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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분석] 서재필에 대해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재필의 생애

2. 서재필의 개화. 독립활동
2.1 초기의 개화활동: 갑신정변
2.2 독립신문, 독립협회 활동
2.2.1 독립신문의 내용
2.2.2 독립신문의 기능
2.2.3 독립협회 활동
2.2.4 미국에서의 활동과 해방 후의 환국

3. 서재필의 사상

4. 서재필에 대한 인식의 전환
본문내용
1. 서재필의 생애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음 1963.11.8)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인 1871년 한성에서 참판벼슬을 하던 외숙 김성근에게 보내져 과거를 준비했다. 김성근의 집에는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자주 드나들어 서재필은 이들과 자주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개화의 필요성과 개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터득했다. 그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1882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서재필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의 국내외 정세는 조선조 정치제도의 자존과 발전을 제약하는 국내외적 요인들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전환기적 변동을 겪고 있었던 때였으며 그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1883년에는 김옥균이 군대의 허약함을 국내외적으로 국권이 유린됨을 보고 서재필에게 일본유학을 권유하고 이에 서재필은 문관으로서의 출세를 마다하고 일본 동경의 도야마 육군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군사 훈련을 배웠다. 정부는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하여 서재필을 포함한 16명의 생도를 1년 2개월 후인 1884년 7월에 소환하게 된다. 이에 서재필은 일본의 도야마학교와 같은 학교를 세우기를 고종에 건의하였고, 궁중에서 국왕의 참석하에 군사 기술 시범을 보였다. 이에 고종은 서재필의 제한에 동의했으나 민비를 중심으로 한 청의 세력은 일본의 세력이 증가하는 것에 반대를 하게 되고 서재필의 생각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집권층의 보수화에 불만을 느낀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당은 조선의 보수적 정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정변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침 국내에 들어와 있던 청군은 베트남 문제로 3천명 중 1500명이 철수를 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 여기에 고무된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변이 청군을 너무 얕잡아 봤으며 일반 대중의 동의를 얻지 못한 위로부터의 정변이란 한계와 일본을 너무 믿고 의존했다는 한계로 인하여 3일 천하로 끝나게 되자 서재필은 김옥균과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갑신정변 1884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