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론]三國遺事(삼국유사)에 나타난 新羅 社會(신라사회)의 文化(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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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시가론]三國遺事(삼국유사)에 나타난 新羅 社會(신라사회)의 文化(문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新羅 和白制
Ⅱ. 新羅 貴族 社會(三國遺事 第 1卷 紀異 第 1 四節遊宅, 辰韓)
Ⅲ. 新羅의 宗敎 - 佛敎와 固有信仰, 民間信仰
Ⅳ. 신라의 結婚 制度 및 結婚 生活
Ⅴ. 놀이와 풍속
Ⅵ. 신라 시대의 衣服
Ⅶ. 신라 시대의 罪와 刑罰
본문내용
Ⅰ. 新羅 和白制
6부의 조상들은 '위로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는 까닭에 백성들이 방종한다'면서 '덕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나라를 세워서 도읍을 두어야한다'는 내용의 회의를 한다. 즉, ③, ⑥, ⑧의 내용을 통해서 和白會議에서는 왕을 추대하고, 왕비를 정하는 등의 국가의 대사(大事)가 의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은 구체적으로 화백회의라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6명이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였다는 데에서 和白會議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알천공이 수석(首席)에 앉았다는 것을 보아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Ⅱ. 新羅 貴族 社會(三國遺事 第 1卷 紀異 第 1 四節遊宅, 辰韓)
신라 전성기에 서울 안에는 17만 8936호, 1360방(坊), 55리(里), 35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여기서 금입택(金入宅)은 부유한 큰집을 뜻한다. 49대 憲康王 때를 살펴보면 四節遊宅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그 당시 서울 안에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서로 닿았으며, 길에 노래소리가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절유택이라는 것은 '봄·여름·가을·겨울 네 계절에 재상들이 놀이하던 별장'이었다. 즉, 憲康王 시대에는 귀족들의 사치를 보여준다. 또한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통해 서울이 매우 번영했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이 역시 귀족들의 사치스러움을 잘 나타내준다. 또한 귀족들은 사치 뿐 아니라 풍류를 즐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길에 노랫소리가 가득할 뿐 아니라 그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귀족들은 사치 뿐 아니라 풍류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Ⅲ. 新羅의 宗敎 - 佛敎와 固有信仰, 民間信仰
『三國遺事』의 感通편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感應)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감이나 영 이(靈異) 등을 다룬 설화들이 각각 실려있다.
불교의 최고 도달 목표는 해탈 혹은 극락으로 가는 것이다. 극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三國遺事』 곳곳에는 불교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련 방법이 드러나 있다. 그 첫번째 방법이 끊임없이 염불을 외는 것이다. 郁面의 경우 승려를 따라 염불을 외기도 하며, 주인에게 벌을 받으면서도 손바닥을 뚫어서 새끼줄로 꿰는 고행을 감수하며 염불을 외고 종내에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②∼⑤). 또한 보천의 경우 역시 수구다라니(隨求 羅尼)를 계속해서 외운다.(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시대에는 남자들이 대부분 불도에 입문하였으며 끊임없이 염불을 외거나 입산을 하여 세속과의 연관을 끊고 수련을 하거나 단정한 자세를 하고 정신 수련을 하였다.
Ⅳ. 신라의 結婚 制度 및 結婚 生活
마지막으로 신라 사회에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일 수 있었다. 임종에게는 사자(嗣子)가 없었는데, 비형랑이 진평대왕에게 소개시킨 길달(吉達)이란 자를 그 양자로 들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⑧)
『三國遺事』에 따르면, 김유신의 막내 누이 문희가 태종 춘추공과 결혼을 함으로 태종은 김유신의 매제(妹弟)가 된다.(③) 다음으로 『三國史記』에 따라 김유신의 가계도를 보면, 김유신의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의 셋째 딸이다. 즉, 태종은 유신의 장인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신의 입장에서 태종은 매제인 동시에 장인인 것이다. 참으로 복잡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근친혼은 왕실에서 자주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경문대왕이 동생을 아내로 택하지 않고 언니를 택한 후, 왕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 범교사가 쉽게 동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⑤) 언니와 동생을 비(妃)로 취하는 예가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왕들에게 아내가 여럿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게 된다(⑤).
참고문헌
『三國遺事』 일연 著, 최호 譯 홍신문화사 1991
『三國史記』 김부식 著,
『한국복식문화사』유희경 外 교문사 1998
『한국의 복식문화』최해율 外경춘사 1993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 사전』1994
『두산 세계 대백과 사전』1996
하고 싶은 말
삼국유사에 나타난 문헌기록을 통하여 화백제, 귀족사회의 모습, 불교, 민간신앙, 고유신앙, 결혼제도 및 결혼생활, 놀이와 풍속, 의복, 죄와 형벌의 모습을 재구하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