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 고건의 리더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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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글
    경제경영 고건의 리더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목 차 -
    1. 서론
    2. 고건의 프로필
    3. 고건에 대한 인물평
    4. 고건의 리더십 특성
    5. 리더십 분석 틀 -칼라 리더십
    6. 리더십 분석
    7. 리더십 평가
    참고 문헌
    1. 서 론
    한 보도에 의하면, 국정 운영 전반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대선 후보별 지지도 조사에서 고건 전 총리가 29.9%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명박 서울시장(25.3%)은 2위, 박근혜 대표(20.2%)는 3위 자리에 올랐고, 고 전 총리는 연령이 높을 수 록, 서울(33.8%)과 광주. 전라(59.6%), 열린우리당 지지자(34.6%), 민노당 지지자(38.5%)에게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대선 후보로서 가장 큰 지지를 받는 고건씨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기에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 1위가 되었을까? 이러한 생각에서 고건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리더십을 분석하고자 한다.
    2. 고건의 프로필
    고건 전 총리는 청와대 정무수적(1979년)을 거쳐 교통부ㆍ농수산부ㆍ내무부 장관, 서울시장(1998~1990), 국무총리(김영삼 정부 말기), 민선 서울시장(1998~2002년), 참여정부 초대 국무총리(2003)등 7개 정권에서 8차례나 국정의 중심에 섰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력 탄핵 사태가 터지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브레이크 없는 성공 가도를 달려온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고건이 중도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크다. 그는 1961년 고동고시 13회로 내무부에 들어간 뒤 수습사무관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승진이 더뎠다.
    ‘보통 1년 6개월이면 수습 딱지를 떼고 계장 직위를 달 수 있었지만 유독 나만 3년이 돼도 수습사무관이었다. 그래서 결국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다. 직업은 바꾸어도 아버지는 바꿀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승진이 늦어진 것은 아버지 탓이었다. 당시 그의 부친인 고형곤 선생은 전북 군산에서 야당 국회의원을 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소위 ‘블랙리스트’ 에 오른 인물에게 출세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때 고형곤 선생이 고건에게 남긴 좌우명이 바로 ‘지성감민’ 이다. 고건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는데, 감천까지는 아니고 감민은 해봐야겠다는 자세로 공무원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다.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사표를 던질 뻔했던 그는 장장 3년 6개월 만에 수습 딱지를 떼고 행정과 기획계장에 임명됐다. 그러던 것이 1971년 초대 새마을 담당관으로 발탁돼 ‘근대화의 대역사’ 였던 새마을운동 실시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했다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를 박정희 대통령이 중용했음은 물론이다.
    대표작이 없어 보이지만 고건이 리드한 서울은 꼼꼼함이 돋보였다. 그는 복마전으로 불리는 서울시 업무를 구석구석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민선 서울시장 재임 시절 최고의 치적으로 클린 시티 운동을 꼽니다. 클린 시티 운동은 말 그대로 민원처리 업무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공무원의부패를 없애자는 운동이다. 그가 채택한 방법은 인터넷 서울시는 지난 1999년 4월부터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시스템을 통해 위생건축 도시계획 등 54개 민원 업무 처리과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도입 3년 만에 방문객이 2백만 명을 넘어섰고 이들이 열람한 시의 행정문서는 4백만 건에 이른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런 기막힌 일도 해냈다.’ 며 고건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온라인 시스템은 부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국제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2001년에 ‘회원국에 시스템을 보급해 달라’는 UN의 요청에 따라 해외로 수출되기까지 한 것이다.
    국가위기관리 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지난 1998년 서울에 수해가 났을 때다. 시간당 강수량이 90밀리미터를 넘는 60년 만의 호우로 유례가 없는 재난이 발생했다. 특히 중랑천 일대는 3만 2천여 가구의 주택과 지하철 7호전이 침수돼 불편을 겪었다. 사실 중랑천 일대는 1987년 이후 6차례나 침수된 ‘상습재해지역’이었다. 당시 고건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수해를 거울삼아 시수방체계를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추진하겠다.’ 사과도 깔끔하고 대책안도 그런대로 깔끔했다. 하지만 가장 깔끔한 것은 일처리 솜씨였다. 이듬해부터 고건이 근무하는 동안 서울시에는 단 한건의 수해신고도 접수되지 않았다. 불과 1년여 동안 하수구를 정비하고 처리용량을 대폭 늘린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을 정비하는 고건 식 행정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도 그는 ’위원회 시장; 이라는 별명답게 ‘수해 원인 조사 및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제 산에도 오르고 바다에도 가겠다.’ 참여정부 초대 국무총리 자리를 사임하면서 고 전 총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할 뜻이 없느냐’는 질문을 이도 저도 아닌 선문답으로 피해간 것이다. 정치활동 여부에 대해선 딱 부러진 대답을 회피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는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 그룹에 들어가 있다.
    3. 고건에 대한 인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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