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신사임당을 존경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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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는 왜 신사임당을 존경하는가
여성은 흔히 가부장적인 사회 하에서 그 활동 영역을 ‘규방 안’, 즉 ‘실내’로 규정 받아왔다.
(신기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지역을 불문하고 ‘인류’라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형태의 발전이 나타났다는 것은 유념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유사한 시기, 강가에서 농업에 기반하여 발생하였고 청동기 철기를 거치어 역사 사회로 진입하는 식? 그 세부 내용은 다를지라도 방향이 비슷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국가를 이루는 기초 단위가 ‘가정’이 되면서부터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가정 내의 사적인 영역과 가정 외의 공적인 영역으로 나뉘게 된다.
한 번 기득권을 잡은 쪽은 누군가를 희생시키더라도 그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 이 경우엔 기득권을 잡은 남성이 여성의 활동영역을 집안으로 제약시키고 여성을 통제의 대상으로 둠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예가 ‘현모양처’상이다. ‘현모양처 상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현모양처론과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여성상에서 기원한다(박노자,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 일본의 목적은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인구의 통제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를 지나가면서 이 ‘현모양처’상은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인 양 고착되게 되는데, 이때 흔히 현모양처의 예시로 제시되는 사람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흔히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라는 논리는 굉장히 간단하다. ‘율곡 이이 같은 훌륭한 학자를 키워낸 어머니’라는 것이다. 내가 다녔던 여학교에서는 교실 한 켠에 신사임당의 초상이 본받아야 할 롤 모델로 제시되어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뛰어난 여류 시인이었고 화가였지만 그녀를 평가하는 기준은 한가지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뛰어난 화가이자 예술가였던 인물을 한 사람의 ‘어머니’로써만 그 지위를 인정해준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사임당이 그렇게 역사적인 인물이자 롤 모델로 그 지위를 인정받는 것과는 달리 허난설헌 같은 인물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지금까지도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하나의 본받아야 할 효시로 규정받고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인물 혹은 역할상을 기준으로 하여 여성 내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통치계급이 그 통치를 원활하게 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나오는 된장녀 논란(물론 지금은 된장남이란 용어도 통용되고 있으나 용어 자체가 ‘된장녀’라는 말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로부터 나온 경우이다.)및 개화기의 신여성과 구여성의,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 대립각 형성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된장녀의 반대는 된장남이 아니라 비 된장녀인가. 어째서 신여성의 대립각으로 세워지는 상대는 신남성이 아니라 구여성인가.’ 대답은 이미 나왔다. 상대적으로 기득권층에 위치하고 있던 남성들이 여성들을 규정하고 통치하기 위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제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허난설헌은 남편의 괄시 속에 쓸쓸히 죽어갔지만, 같은 예술가인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친정에서 거주했고 아이도 친정에서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이이가 뛰어난 유학자로 명성을 날렸기에 현모양처의 효시가 되며 기득권의 용서를 받았다. 넌센스다. 두 여성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분명히 여성 내부의 대립각을 세우는 게 지배층의 논리라는 것은 맞다. 그 대립각의 대부분이 남자일거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립구조 속에서 여성의 반대편에 남성이 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여성이 서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모양처이거나 현모양처가 아니거나 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가 사람의 도의적인 수준-예컨대 아이를 방치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수준-까지 도달하는 게 아니라면 개인의 성향 문제이다. 누군가는 내조하는 삶을 기꺼워할 것이고 누군가는 경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할 테니까. 신여성과 구여성의 문제는 혼란스럽던 개화기에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난, 그래서 지배층을 위협한 ‘여성’들을 비난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신여성도 구여성도 잘못한 것은 아니며 어느 한 쪽이 부도덕한 것도 아니다. 단순히 교육기회와 환경의 차이이다. 된장녀 논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의 소비습관을 가진 사람은 남성과 여성, 성별을 떠나서 문제가 된다.
기득권들이 이러한 문제를 대립각을 통하여 대립관계의 한 쪽이 어떠한 문제가 있는 양 주장하는 것은 분명 그들의 이득권을 보호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요한 것은, 왜 여성 내부에서 대립각을 만드는 것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악용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지, 여성의 대척점에 남성을 설정하여두고 여성 내부의 대립각을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대립구도 하에서 여성만 그런 게 아니다. 남성도 똑같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이거나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써’문제가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히스토리(history)가 있으니 허스토리(her story)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의 산물이랄까, 너희가 이만큼 우릴 괄시했으니까 우리도 똑같이 너희를 괄시해주마. 란 느낌으로,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와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앙갚음에 그 주안점을 둔 논리니까. 차라리 남녀 모두 공정하게 다루어 질 인간의 이야기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 진정으로 평등해지고자 한다면, 여성 스스로 타인이 규정한 여성내부의 대립구도를 여성과 남성, 여성과 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대립구도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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