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 중국의 만남 - 서양의 관점으로 바라 본 중국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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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양과 중국의 만남
- 서양의 관점으로 바라 본 중국 철학
1. 서양의 시대적 흐름
먼저, 서양이 중국의 철학, 즉 사상으로 어떻게 바라보았냐는 측면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서는 책 속에 나와 있는 서양의 근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은 중세 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듯 했다. 물론 천여 년에 걸친 종교적 신념은 여전히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매김해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여전히 중세 이후에도 종교 중심의 역사가 흐른다는 것이다. 중세 말 가톨릭교의 부패에 반발한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 성서중심의 루터파와 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은 칼뱅파인 신교의 등장으로 유럽 전역에 구교에 대한 반발과 신교의 확산은 가톨릭교가 정통적인 ‘예수회’를 조직하고 자체 정화작업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작업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신교도)에게 빼앗긴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종교 갈등 속에 신의 대리인이라고 명명한 왕이 등장하여 절대왕권의 시대가 열린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절대왕권과 비인간적, 종교적인 중세시대를 벗어나 인간에 대해 고찰하는 그리스, 로마시대로의 귀향을 꿈꾸는 르네상스 시대가 왔고 이 후 다양한 철학가들 즉, 계몽주의자들이 나왔다. 계몽주의자는 이러한 신앙 중심의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절대왕권 등을 반박하였다.
2.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은 고대와 중세의 철학으로써 바르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철학적 탐구의 하나로 여겨졌다. 교부들은 핍박받는 사회 속에서 신앙의 진리를 단순히 계시를 통해서 파악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시작으로 기독교 신앙을 파악해야한다고 보아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플라톤의 정신 비물질성과 이데아설, 직접적인 신 인식의 사상을 근거로 발전했다.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는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을 개설하였고 이러한 수도원은 쾌락을 절제하고 욕망을 억제하는 스토아주의를 일부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11세기에는 미사, 성상, 존재론 등의 논제에 대해 철학적, 이성적 사유가 발전하며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학문적 토론의 장을 위해 학교(스콜라)가 설립되어 스콜라 학문적 사유형태가 발달하였다. 스콜라적 사유에는 사유와 존재의 관계 및 보편과 개별자의 존재 양식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시작되었다. 12세기 이후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발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종교철학에 대해 계몽주의자들은 왜 반박하였을까? 이는 계몽주의가 신앙이 아닌 이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국가는 개인의 목적적 창조물일 뿐이며 신에 의한 국가 창조론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절대왕권에 대해서도 회의를 드러냈다.
3. 전례논쟁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학문은 르네상스 시대의 출현으로 이후 철학적 주류 흐름에 벗어났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서도 여전히 서양에서 종교의 열의는 끊이지 않았고 선교활동은 계속되었다. 앞서 말했듯, 가톨릭의 선교활동은 ‘과학, 학문을 통한 전도정책’을 통해 유럽을 넘어 중국까지 뻗어나간다. 이러한 중국의 선교활동에는 파마다 다른 견해를 보인다. 마테오 리치가 소속된 정통 가톨릭교인 예수회는 선교정책의 하나로 ‘보유론’을 내세웠고 기실 유가외의 여타 도가와 불가를 비판한 것은 유가와 기독교의 공통적 특징(민간 신앙과 우상숭배 폄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회의 우호적 입장은 송대의 변형되기 전 유가와 중국의 실천적, 윤리적 철학, 국가 경영, 관료제도 등을 묘사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강희제를 윤리와 도덕으로 정치하는 계몽군주로써 묘사하며 절대왕권을 반박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세계관과 보편적 근본철학사상을 지지하던 라이프니츠도 당시의 활발한 중국전도 속에서 중국의 유가적 사상을 고찰하였고 유가적 정치사회 즉, 도덕과 윤리를 기반으로한 강희제의 정치체제를 닮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역경 속에 나오는 64괘를 통해 중국인은 이미 이진법의 원리를 알며 0은 무, 1은 창조라 생각한다고 여겼다. 즉, 역경64괘의 개념을 보았을 때 이미 중국인은 신의 존재를 알며 믿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을 대변하는 예수회와 달리 포르투칼의 지지를 받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는 중국의 하늘숭배, 공자숭배, 조상숭배를 사회적 의례가 아닌 종교적 우상수배로 여겼고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사실 예수회와 도미니크회, 프란시스코회의 기득권 싸움 즉, 유럽내부 각국의 민족국가, 시민사회 형성에 따른 이해관계의 반영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후의 예수회 해체는 세력구조의 변화도 엿 볼 수 있다. 또한, 도미니크회를 지지했던 말브랑슈는 당시의 성리학의 무신론적 자연주의적 성격을 단지 스피노자주의를 반박하는데 이용했을 뿐이었다. 헤겔은 라이프니츠와 상대적으로 중국을 세 가지 가설로 해석하였다. 지배구조의 전제적 성격, 중국문명의 불변성,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중국인의 무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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